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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 & Ethics[가치와 규범]/Humanity[인간과 실존]

황석영 '손님' :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무서운 손님이 되었나

by 소음 소믈리에 2026.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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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손님,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가 부른 비극의 진혼곡
서양에서 들어온 두 가지 거대한 외래 사상이 한반도의 작은 마을에서 어떻게 끔찍한 비극을 만들어냈을까요. 이념이라는 이름의 '손님'을 맞이해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와, 이를 치유하기 위한 열두 마당의 장엄한 문학적 굿판을 지금부터 들여다보겠습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는 아직도 온전히 아물지 않은 깊은 흉터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아파서, 혹은 너무 끔찍해서 애써 외면하고 덮어두려 했던 기억들이 있지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황석영 손님 독서 노트는 바로 그 외면하고 싶었던 우리의 뼈아픈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과거의 아픔을 단순히 들춰내는 것을 넘어, 상처 입은 모든 영혼들을 위로하고 진정한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숭고한 의식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황석영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항상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무력하게 휩쓸려야만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은 유독 특별한 무게감을 지니고 다가옵니다. 한국 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 지역에서 발생했던 끔찍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작가가 이 비극의 원인을 외부의 적이 아닌, 우리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어온 두 가지 외래 사상, 즉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충돌에서 찾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옛사람들이 천연두를 '손님'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대접하여 돌려보내려 했던 것처럼, 한반도에 예고 없이 찾아온 이 무서운 이념의 손님들이 어떤 파국을 몰고 왔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 상처를 어떻게 씻어내야 하는지를 열두 마당의 전통 굿 형식을 빌려 장엄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자, 그럼 첫 번째 굿판의 문을 열어보겠습니다.

 

1. 부정풀이 외래 사상의 도래와 씻어내야 할 역사적 환상들

황석영 손님의 첫걸음은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황해도 진오귀굿의 첫 번째 절차, 부정풀이에서 시작합니다. 부정풀이는 본격적인 굿판을 벌이기 전, 굿을 하는 장소와 사람들에게 깃든 부정한 기운을 가시고 정화하는 의식입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류요섭 목사가 수십 년 만에 고향인 북한 황해도 신천을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 행위 자체가 바로 이 거대한 역사적 부정풀이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겹겹이 쌓인 오해, 분노, 그리고 조작된 기억이라는 부정을 씻어내지 않고서는 진정한 치유의 단계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비극을 단순히 감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넘어, 상시로 승인된 고도의 전방위적 분석 모드를 가동하여 당시 신천 사회의 역학 관계를 냉철하게 해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황해도 신천은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참혹한 양민 학살이 일어난 곳입니다. 북한 당국은 오랜 기간 이 신천 학살을 미제 승냥이들, 즉 미군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범죄로 규정하고 반미 교양의 핵심 소재로 활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황석영은 이 소설을 통해 굳어진 역사의 지층을 뚫고 들어가, 그 끔찍한 학살의 주체가 사실은 미군이 아니라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웃들, 즉 기독교를 믿는 우익 청년들과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좌익 청년들이었음을 폭로합니다. 이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진실이며, 남북한 모두가 외면하고 싶었던 역사의 민낯입니다.

손님이라는 제목 자체가 지니는 은유를 깊이 파고들어 보아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은 천연두를 마마 혹은 손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외부에서 찾아온 무섭고 치명적인 역병을 마치 귀한 손님처럼 깍듯이 대접하여 무사히 물러가기를 바라는, 두려움과 경외가 뒤섞인 역설적인 명칭입니다. 황석영은 이 천연두라는 역병에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개의 서구 근대 이념을 완벽하게 대입시킵니다. 수천 년 동안 씨족 공동체를 이루며 흙에 기대어 살아가던 한반도의 민초들에게, 해방과 함께 밀어닥친 이 두 외래 사상은 이성적인 설득이나 논리적인 체화를 거칠 여유도 없이, 마치 무서운 속도로 번지는 전염병처럼 사람들의 정신을 잠식해 들어갔습니다.

황해도 지역은 지리적, 역사적 특성상 서양 문물의 유입이 빨랐고, 기독교의 교세가 유독 강했던 곳입니다. 토지를 소유한 지주 계층과 자본을 축적한 상공인들은 기독교를 수용하여 서구적 근대화를 꾀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려 했습니다. 반면, 이들의 땅을 부치며 가난에 시달리던 소작농들과 헐벗은 민중들에게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평등 사상이 복음처럼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신천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서, 수백 년 동안 형님 동생 하며 지내던 이웃들은 하루아침에 십자가를 든 자들과 붉은 완장을 찬 자들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이념은 세상을 해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상대방을 배제하고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는 절대적인 도그마, 즉 신앙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부정풀이 장에서는 류요섭 목사의 내면의 갈등과 그가 짊어진 죄책감이 무겁게 그려집니다. 그는 미국에서 성공한 목회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의 영혼은 언제나 피비린내 나는 신천의 기억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의 형 류요한은 우익 기독교 청년단의 핵심 인물로, 학살을 주도했던 가해자 중 한 명입니다. 요섭은 형의 뼈를 고향 땅에 묻어주고자 하는 개인적인 목적을 넘어, 이념의 광기가 만들어낸 거대한 살륙의 현장을 직시하고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위한 진혼곡을 부르기 위해 길을 나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분법적인 선악의 구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선이고 마르크스주의는 악이라는, 혹은 그 반대의 평면적인 해석은 이 소설이 지향하는 바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숭고한 이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맹목적인 믿음과 배타적인 증오와 결합할 때 인간을 얼마나 잔혹한 괴물로 만들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황석영이 그려낸 1950년대의 이념적 감염 상태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디지털 부족주의나 알고리즘에 의한 확증 편향 현상과 놀랍도록 맞닿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정보와 사상이라는 새로운 손님들에게 실시간으로 노출되어 있으며, 때로는 그것들에 영혼을 빼앗겨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향해 맹렬한 적의를 드러내곤 합니다. 따라서 황석영 손님의 부정풀이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정정하는 것을 넘어, 지금 우리가 맹신하고 있는 절대적 진리들이 혹시 또 다른 형태의 전염병은 아닌지, 스스로의 내면을 냉철하게 진단하고 정화할 것을 요구하는 강력한 현대적 메시지로 기능합니다. 끊임없이 유입되는 외부의 정보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해 내지 못할 때, 우리는 언제든 다시 이념의 굿판 위에서 칼춤을 추는 광인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외래 사상의 토착화가 부른 끔찍한 돌연변이 현상
황석영 작가는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서양의 사상들이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우리의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이나 정서와 융합되지 못한 채, 맹목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잘못 수용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서구의 합리성을 결여한 채 맹신과 증오만 남은 이념은, 결국 우리 민족의 몸에 치명적인 발진을 일으키고 생명을 앗아가는 천연두, 즉 악성 '손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2. 신을 받음 이념의 육화와 광기로의 초대

부정풀이를 통해 역사적 진실을 가리고 있던 거짓된 장막을 걷어냈다면, 다음 단계인 신을 받음에서는 어떻게 그 낯선 손님들이 마을 사람들의 몸과 마음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게 되었는지, 그 빙의의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합니다. 무속 신앙에서 신을 받는다는 것은 무당이 신령의 존재를 자신의 몸 안으로 모셔 들여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예언과 치유의 능력을 행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황석영 손님에서는 이 신내림의 과정이 한반도의 민중들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외래 이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절대화하는 끔찍한 역사적 현상으로 변환되어 나타납니다.

이념이 어떻게 종교가 되고, 종교가 어떻게 살육의 면죄부가 되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해방 직후 신천 지방의 지주와 자본가 계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방패로 기독교를 선택했습니다. 이들에게 기독교의 교리는 단순히 영혼의 구원을 넘어,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의 부와 지위를 지켜줄 강력한 수호신이었습니다. 반면, 오랜 세월 지주들의 착취에 짓눌려 살았던 소작농과 빈농들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이 땅 위에 천국을 건설해주겠다는 구원의 메시지였습니다. 지주들의 창고를 열어 쌀을 나누고 땅을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공산당의 약속은, 그 어떤 종교적 기적보다도 달콤하고 현실적인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두 사상이 한반도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성적인 담론이나 철학적인 성찰을 거칠 틈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집어삼키듯,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취사에 가까웠습니다. 그 결과, 서구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탄생한 이 근대 이념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적 기복 신앙과 기형적으로 결합하게 됩니다. 예수의 사랑과 원수 갚음, 마르크스의 변증법과 피의 복수가 뒤섞이면서, 이념은 논리적 정합성을 잃고 오직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죽여야 한다는 맹목적인 주술로 전락하고 맙니다.

소설 속 류요한의 캐릭터는 이러한 맹목적 신앙이 낳은 광기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요한을 비롯한 우익 기독교 청년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성전으로 포장합니다. 그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은 단순히 정치적 반대파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사탄의 무리이자 반드시 멸절시켜야 할 악마들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광기가 20세기 한반도의 작은 마을에서 재현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방패 삼아 죽창을 찌르고 방아쇠를 당길 때, 그들은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단자를 처단함으로써 천국에 더 가까워진다는 끔찍한 착각 속에 빠져듭니다. 신을 받았다는 것은 곧 이념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괴물에게 자신의 인간성과 자유의지를 완전히 헌납해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좌익 세력 역시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신에 빙의되어 있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인민의 해방과 평등이라는 숭고한 목표는, 당의 지시라면 어제까지 형님 동생 하던 이웃의 목에 서슴없이 칼을 들이대는 맹목적인 복종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계급 투쟁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인민재판과 학살은 우익 청년단의 만행 못지않게 잔혹했습니다. 지주 계급으로 분류된 이들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 벌레처럼 취급당하고 도륙당했습니다. 이념이라는 렌즈를 끼는 순간, 사람의 눈에는 상대방의 따뜻한 체온이나 가족들의 슬픈 눈물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오직 타도해야 할 반동 분자 거나 척결해야 할 빨갱이 라는 납작하고 차가운 기호만이 남을 뿐입니다.

신을 받음 장에서 황석영은 극도로 절제되고 건조한 문체로 이 참혹한 인간성의 상실 과정을 묘사합니다. 작가는 섣불리 어느 한쪽의 편을 들거나 감상에 빠지지 않고, 마치 복잡한 통제 구조 속의 변수들을 계산해 내듯, 개인의 의지가 어떻게 거대한 집단적 광기에 휩쓸려 가는지를 냉철하게 분석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과연 그 시절 신천 사람들의 몸에 강림했던 것은 구원의 신이었는가, 아니면 파멸을 부르는 악귀였는가? 외부에서 들어온 사상이 주체적인 성찰 없이 수용될 때,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폭력으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이 소설은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70년 전의 낡은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수많은 갈등들, 세대 갈등, 성별 갈등, 정치적 양극화 현상들 역시, 어쩌면 우리가 또 다른 형태의 잘못된 신을 받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일지도 모릅니다. 특정 진영의 논리나 이데올로기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며 상대를 악마화하는 태도는, 신천에서 죽창을 들었던 청년들의 광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황석영 손님의 이 서늘한 통찰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강력한 거울이 됩니다. 이념의 육화가 가져오는 참혹한 결말을 직시함으로써, 우리는 맹신이라는 전염병에 대항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백신을 스스로 개발해 내야만 합니다.

3. 저승사자 및 대내림 죽음의 그림자와 폭력의 폭발

신을 받는 의식을 거쳐 맹목적인 이념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결과는 파멸과 죽음입니다. 소설의 저승사자와 대내림 장은 신천 학살이라는 거대한 비극이 어떻게 구체적인 실행 단계로 돌입하여 통제 불능의 참상으로 치닫게 되는지를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그려냅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대를 내린다는 것은 신령의 뜻이 굿대에 완전히 임하여 무당이 인간의 의식을 잃고 신의 대리인으로서 움직이는 절정을 의미합니다. 신천 땅에서 대내림이란, 곧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이성과 도덕률이 완전히 마비되고 오직 살육을 향한 맹수적인 본능만이 거리를 지배하게 된 52일간의 끔찍한 학살극을 상징합니다.

저승사자는 죽음을 집행하는 존재입니다. 신천에 들이닥친 저승사자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옆집에 살던 이웃들이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은 평소 마을 공동체 내부에 억눌려 있던 온갖 갈등과 원한들을 수면 위로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땅 주인과 소작농 사이의 해묵은 감정, 개인적인 앙심, 심지어 사소한 이권 다툼까지도 모두 좌우 이념 대립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이념은 그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훌륭한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어제까지 밭을 같이 매고 잔치에서 막걸리를 나누던 이웃들이 서로를 향해 죽창을 들고 총구를 겨누는 상황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지옥의 가장 완벽한 구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참혹한 살육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면서 인간 본성의 어두운 심연을 응시하게 됩니다. 폭력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피가 피를 부르고,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가 한번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 어떤 합리적인 통제 시스템으로도 이를 제어할 수 없게 됩니다. 미군이 북상하여 인민군이 퇴각하던 시기, 우익 기독교 청년들은 그동안 겪었던 핍박에 대한 보복으로 좌익 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노인과 여성,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빨갱이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명분 아래 끔찍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방공호에 사람들을 가두고 불을 지르거나, 우물에 산 채로 던져 넣는 등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반대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미군과 우익 세력이 쫓겨가게 되었을 때, 살아남은 좌익 세력들 역시 똑같은 방식, 아니 그보다 더 잔혹한 방식으로 피의 보복을 감행했습니다. 이 대내림의 광란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의미를 상실합니다. 오직 죽이는 자와 죽는 자라는 짐승 같은 생존의 논리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황석영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피해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독교 우익 청년단의 잔혹함과 공산주의 좌익 청년들의 잔혹함을 동등한 무게로 다루며, 이념이라는 허울 뒤에 숨은 인간의 적나라한 폭력성을 고발합니다. 이 잔혹한 거울상(mirror image)의 구조는 독자들에게 엄청난 철학적 충격을 안겨줍니다. 절대 선이라고 믿었던 내 편의 진실이 사실은 절대 악의 모습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은 뼈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소설의 탁월한 점은 이 끔찍한 학살의 현장을 생존자들의 파편화된 기억과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교차시키며 재구성한다는 것입니다. 다성적(polyphonic) 서사 구조를 통해, 하나의 고정된 역사적 진실을 강요하는 대신 수많은 개인들의 엇갈린 진술들을 병치시킵니다. 원혼들이 무당의 입을 빌려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토로하듯,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끔찍했던 기억들을 토해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스러져간 이름 없는 개인들의 고통과 직면하게 됩니다. 수식어나 감정의 과잉 없이 무미건조하게 서술되는 학살의 장면들은 역설적으로 그 비극의 깊이를 더욱 뼈저리게 전달합니다.

대내림의 광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폐허뿐입니다. 이웃을 죽이고 살아남은 자들의 내면 역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생존자들은 평생을 지옥 같은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류요한이 보여주는 지독한 반공주의적 집착과 공격성은, 역설적으로 그가 저지른 죄책감의 깊이와 자신이 경험한 공포의 크기를 반증하는 병리적 현상입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하기 위해 평생을 더욱 맹목적인 이념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황석영 손님의 이 전반부 서사는 이념적 양극화가 종국에 도달하게 되는 곳이 결국은 공멸이라는 역사적 법칙을 서늘하게 증명해 냅니다. 이는 복잡한 변수들을 계산하여 파국을 막아야 하는 분석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피해야 할 최악의 시나리오, 즉 마이너스 섬(negative-sum) 게임의 전형적인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4. 맑은 혼 이념의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마주하는 벌거벗은 영혼들

대내림의 끔찍한 학살극이 지나간 후, 굿판은 맑은 혼이라는 정화의 의식으로 접어듭니다. 전통 무속 신앙에서 맑은 혼은 이승의 온갖 번뇌와 원한, 억울함으로 탁해진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씻어내어 본래의 맑고 순수한 상태로 되돌리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소설 손님에서 이 장은 이념이라는 두꺼운 갑옷을 벗어 던진 채, 비로소 날것 그대로의 벌거벗은 인간으로서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서글픈 대면식을 그려냅니다. 류요섭 목사는 미국에서 날아와 수십 년 만에 고향 땅을 밟았지만, 그를 맞이하는 것은 환영의 인사가 아니라 구천을 떠도는 고향 사람들의 억울한 목소리들입니다.

이념의 언어는 한없이 차갑고 배타적입니다. 반동 분자, 빨갱이, 미제 승냥이, 지주 계급이라는 단어들은 그 대상이 숨을 쉬고 피가 흐르는 따뜻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는 언어적 폭력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잃고 영혼만 남은 맑은 혼의 상태에서, 그들은 더 이상 당의 강령이나 교회의 교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젖먹이 아이를 두고 죽어야 했던 어미의 통곡, 영문도 모른 채 죽창에 찔려야 했던 농부의 억울함, 형제처럼 지내던 이웃의 손에 가족을 잃은 피맺힌 슬픔입니다. 황석영은 이 지점에서 거대 담론이 철저히 묵살해버린 미시적인 개인의 고통을 서사의 중심에 소환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이념의 승패나 체제의 우월성으로 재단하려는 거시적 폭력에 대한 단호한 거부이자, 개별적 생명의 존엄을 복원하려는 처절한 문학적 시도입니다.

우리는 이 맑은 혼의 과정을 통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손님이 남기고 간 상처의 깊이를 정확하게 측량해야 합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신천 마을 사람들은 두레와 품앗이를 통해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던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이식된 서구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이 유기적 연결망을 무참히 난도질했습니다. 맑은 혼 장에서 등장하는 원혼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결코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나뉠 수 없음을 증언합니다.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고, 다시 내일의 처형 대상이 되는 혼돈의 수레바퀴 속에서, 진정한 악은 이념의 차이를 이유로 살육을 정당화했던 그 맹목적인 시스템 자체였습니다.

류요섭의 형이자 우익 기독교 청년단의 핵심이었던 류요한의 영혼 역시 이 맑은 혼의 자리에서 자신의 죄업을 대면하게 됩니다. 살아서는 반공이라는 이름의 성전을 치른다고 굳게 믿었지만, 사후 세계에서 그가 마주한 진실은 권력에 대한 탐욕과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공포가 만들어낸 비극이었습니다. 요한의 영혼이 겪는 고통은 이념의 껍데기가 벗겨진 후 드러나는 인간 본연의 끔찍한 맨얼굴에 대한 전율입니다. 마찬가지로 인민의 이름으로 피의 숙청을 단행했던 좌익 청년들의 영혼 역시 자신들이 꿈꾸던 유토피아가 사실은 이웃의 피 위에 세워진 신기루였음을 깨닫고 절망합니다.

맑은 혼의 상태란 곧 우리가 지닌 모든 사회적 페르소나와 이데올로기적 방어기제를 해제한, 일종의 심리적 영점 조준 상태를 의미합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수많은 정보와 신념의 파편들로 정신이 탁해져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진영의 논리만을 맹신하며 타자를 악마화하는 현대판 이념 전쟁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본연의 맑은 혼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황석영 손님이 던지는 섬뜩한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을 덮고 있는 그 굳건한 신념의 껍데기를 모두 벗겨내었을 때, 그 안에 남아있는 것은 타인을 향한 따뜻한 연민입니까, 아니면 배타적인 증오입니까? 우리는 역사적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영혼을 끊임없이 맑게 닦아내는 자기 객관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5. 베 가르기 이승과 저승, 가해자와 피해자의 지독한 경계를 찢다

맑은 혼의 과정을 거쳐 서로의 고통을 날것 그대로 확인한 원혼들은 이제 베 가르기라는 결정적인 의식의 무대에 오릅니다. 무속에서 베 가르기는 무당이 길게 늘어뜨린 하얀 무명베를 자신의 몸으로 거침없이 찢으며 나아가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찢어진 베는 이승과 저승,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 경계이자, 동시에 죽은 자가 이승의 모든 미련과 원한을 끊어내고 저승으로 건너가는 고통스러운 통과의례의 길을 상징합니다. 소설 손님에서 이 베 가르기는 단순히 이승과 저승의 분리를 넘어, 신천 학살이라는 비극을 잉태했던 좌와 우, 기독교와 공산주의,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그 지독하고도 견고한 이분법의 경계를 온몸으로 찢어발기는 처절한 해체 작업으로 치환됩니다.

이 베 가르기의 중심에는 가해자의 원혼과 피해자의 원혼이 서로 맞부딪히는 극한의 충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익 청년단의 리더였던 류요한의 귀신과 그에게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던 인민위원장 박일랑의 귀신, 그리고 서로 죽고 죽였던 수많은 마을 사람들의 영혼이 한데 엉켜 각자의 정당성과 억울함을 토해냅니다. 이들의 논쟁은 살아서 벌였던 이념 투쟁의 연장이지만, 육신이라는 껍데기가 사라진 곳에서 벌어지는 대립은 훨씬 더 원초적이고 비극적입니다. 십자가를 앞세워 학살을 정당화하려는 자와, 계급 투쟁의 논리로 보복을 정당화하려는 자들의 외침은 허공을 떠돌며 찢어지는 베의 파열음처럼 독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베어냅니다.

황석영 작가는 이 베 가르기의 굿판을 통해 한반도를 반 토막 낸 냉전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무참히 폭로합니다. 겉으로는 기독교 문명과 마르크스주의라는 거창한 세계사적 담론을 표방했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던 것은 토지를 둘러싼 지주와 소작농의 밥그릇 싸움, 양반과 상놈이라는 전근대적인 신분 제도의 잔재, 그리고 사소한 개인적 원한들이 얽히고설킨 이전투구였습니다. 외래의 손님들은 이 토착적인 갈등의 불씨에 기름을 부은 방화범에 불과했습니다. 베가 북북 찢어지는 소리는 곧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끈끈한 씨족 공동체의 유대가 파괴되는 소리이자, 얄팍한 이념의 잣대로 이웃을 타자화하고 악마화했던 인간 이성의 타락을 알리는 경고음입니다.

이 참혹한 경계 해체의 과정에서 주인공 류요섭의 역할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그는 가해자의 동생이자 미국이라는 제1세계에서 안락한 삶을 누려온 관찰자이지만, 고향 땅에서 벌어지는 이 영적인 굿판에 휘말리며 스스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는 영매, 즉 무당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요섭은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 심판관 노릇을 하는 대신, 두 진영의 원혼들이 토해내는 핏빛 증언들을 묵묵히 경청하고 그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냅니다. 가해자의 죄책감과 피해자의 원한이 결코 무 자르듯 분리될 수 없으며, 폭력의 수레바퀴 속에서는 모두가 이념이라는 손님에게 감염된 처참한 희생자였음을 깨닫는 과정이 바로 베 가르기의 진정한 철학적 의미입니다.

이 베 가르기의 파열음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쳐진 수많은 보이지 않는 장벽들을 향해서도 유효한 울림을 갖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진보와 보수, 자본과 노동, 남성과 여성이라는 수많은 이분법적 베를 쳐놓고, 그 경계선 너머의 사람들을 향해 끝없는 혐오와 적대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배제함으로써 내 편의 결속을 다지는 이 얄팍한 분열의 정치는, 신천에서 서로를 향해 죽창을 겨누었던 그 맹목적인 광기의 21세기 버전일 뿐입니다. 손님의 베 가르기는 우리에게 그 편협한 진영 논리의 베를 과감히 찢고 나와,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타인의 고통과 삶의 맥락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것을 준엄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분법의 감옥을 부수지 않고서는 진정한 사회적 연대도, 역사적 상처의 치유도 불가능함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6. 생명돋움 죽음의 잿더미 위에서 다시 피어나는 화해와 치유의 싹

갈기갈기 찢어진 이념의 베 틈새로 비로소 희미한 빛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진오귀굿의 다음 단계인 생명돋움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참상의 한가운데서도 결코 소멸하지 않고 다시 끈질기게 피어오르는 생명의 복원력과 위대한 연속성을 찬미하는 장입니다. 류요섭 목사는 과거의 망령들과의 고통스러운 대면을 거친 후, 비로소 북한이라는 현재의 공간에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삶을 직시하게 됩니다. 그곳에는 이념의 화석이 되어버린 과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끔찍한 학살의 잿더미 위에서도 밥을 짓고, 아이를 낳고, 묵묵히 흙을 일구며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숭고한 현재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생명돋움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비는 차갑고 관념적인 이데올로기와 따뜻하고 구체적인 인간의 육체성 사이의 충돌입니다. 기독교의 교리나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은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정작 그것이 현실에 뿌리내릴 때는 인간의 몸을 파괴하고 피를 흩뿌리는 죽음의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반면, 아무런 거창한 이념 없이도 계절이 바뀌면 씨를 뿌리고 자식의 입에 들어갈 밥을 짓는 민초들의 본능적인 생명력은, 그 어떤 폭력적인 사상보다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상처 난 공동체를 서서히 치유해 갑니다. 요섭이 고향 땅에서 만난 조카들과 남겨진 혈육들은 과거의 원한에 얽매여 있기보다는 오늘 하루의 삶을 살아내는 데 집중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황석영은 이 대목에서 이데올로기의 절대성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듭니다. 신천 학살이라는 한반도 현대사의 가장 잔혹한 트라우마조차도 도도하게 흐르는 생명의 강물을 영원히 멈춰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가해자의 핏줄과 피해자의 핏줄이 다시 한 마을에서 섞여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상처를 부대끼고 체온을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거대한 역사적 역설이자 치유의 메커니즘입니다. 서로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믿었던 미친 시대가 지나간 자리에, 당신이 살아야 나도 살 수 있다는 인간 본연의 연대 의식이 마치 잘린 나무 밑동에서 돋아나는 새순처럼 조심스럽게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이 생명돋움의 굿판은 복수와 징벌이라는 앙갚음의 논리로는 결코 역사의 상처를 씻어낼 수 없음을 웅변합니다. 피는 피로 씻을 수 없고, 원한은 원한으로 갚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복수란 가해자를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된 삶의 터전 위에 다시 온전한 인간의 삶을 꽃피우는 것입니다. 요섭은 북한의 혈육들과 음식을 나누고 눈물을 흘리며, 이념의 두꺼운 벽을 넘어선 핏줄의 끈끈함과 인간애를 확인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아가페나 공산주의적 동지애와 같은 거창하고 수입된 개념이 아니라, 오랜 세월 이 땅의 민초들이 체화해 온 수수하고 끈질긴 정(情)과 살림의 철학입니다.

생명돋움은 시스템의 오류를 수정하는 가장 궁극적인 방식이 결국 오가닉(organic)한 인간관계의 복원에 있음을 증명하는 과정입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짜인 정치적 해법이나 제도적 보상 장치라 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된 체온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치유에 불과합니다. 황석영 손님이 제안하는 구원의 길은 하늘에 있는 신에게 의지하거나 완벽한 체제를 구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이웃의 손을 맞잡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오늘 하루를 묵묵히 살아내는 그 평범하고도 위대한 일상의 복원에 있습니다. 이념의 차가운 금속성 소리가 멎은 자리에 비로소 사람의 따뜻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손님이 전하는 생명 돋움의 기적입니다.

7. 시왕 역사의 엄정한 심판대 앞에서 묻는 용서의 진정한 의미

생명의 복원력을 확인한 후, 진오귀굿은 죽은 자들의 죄업을 심판하는 시왕의 단계로 진입합니다. 불교 및 무속 신앙에서 저승을 다스리는 열 명의 대왕, 즉 시왕 앞에서는 이승에서 지은 모든 선악의 행위가 명경대라는 거울에 한 치의 오차 없이 비치게 됩니다. 소설 손님에서 이 시왕의 재판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일탈을 단죄하는 종교적 형벌의 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광기의 손님에게 영혼을 팔고 서로의 심장에 칼을 꽂았던 한반도 현대사 전체를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올려놓는 거대하고도 엄숙한 철학적 법정입니다.

시왕 앞에 선 류요한과 박일랑, 그리고 수많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원혼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행위가 역사라는 거대한 재판관 앞에서 얼마나 어리석고 맹목적인 것이었는지를 처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살아생전 그토록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이념의 정당성이나 체제의 수호라는 명분은, 인간의 피를 흘리게 한 원초적인 폭력성 앞에서는 그 어떤 면죄부도 되지 못합니다. 우익 청년단의 십자가도, 좌익 청년단의 붉은 깃발도 저승의 재판관 앞에서는 그저 살육을 위한 도구이자 알리바이에 불과했음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흥미로운 점은 황석영 작가가 이 심판의 과정에서 어느 한쪽을 일방적인 악마로 매도하거나 영웅으로 추켜세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시왕의 심판이 향하는 궁극적인 칼끝은 방아쇠를 당긴 개인의 손가락 너머, 그들의 손에 무기를 쥐여 주고 증오를 세뇌했던 시대의 구조적 모순과 거대 권력의 횡포를 향해 있습니다. 미군과 소련군이라는 외세의 대리전 양상으로 치달았던 분단 상황, 지주와 소작농이라는 오랜 계급적 착취 구조, 그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중들을 이념의 사지로 내몰았던 남북한의 위선적인 권력층이 바로 숨겨진 진짜 가해자들입니다. 따라서 시왕 장에서 원혼들이 겪는 형벌은 지옥 불에 떨어지는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자신들이 역사의 거대한 장기판 위에서 한낱 소모품으로 이용당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허망한 명분을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이웃을 파괴했다는 끔찍한 진실을 직면하는 지독한 정신적 각성입니다.

이 준엄한 역사의 심판대 앞에서 소설은 가장 도달하기 힘든 고차원의 주제인 용서를 조심스럽게 꺼내 듭니다. 여기서 말하는 용서는 과거의 잘못을 덮어두거나 기계적으로 화해하자는 값싼 낭만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맹목적인 이념의 폭력성에 희생당한 같은 시대의 희생양이었음을 뼈아프게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존재론적 연대입니다. 류요한의 귀신과 박일랑의 귀신이 저승의 문턱에서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마침내 원한의 매듭을 푸는 장면은, 이 소설이 지향하는 구원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서로를 용서함으로써 비로소 이념의 포로라는 끔찍한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고 구천을 떠날 수 있게 됩니다.

이 시왕의 판결문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이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복잡한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진정한 과거의 극복은 가해자를 찾아내어 물리적으로 처벌하는 1차원적인 응보적 정의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폭력을 잉태했던 시대적 맥락을 철저히 분석하고, 가해자 역시 왜곡된 시스템의 또 다른 피해자일 수 있다는 입체적인 시각을 가질 때 비로소 회복적 정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황석영 손님은 이 시왕의 굿판을 통해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단과 이념 대립이라는 무거운 역사의 업보를 어떻게 심판하고, 또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그 해답은 승자의 오만한 단죄가 아니라, 인간의 나약함과 역사의 맹목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뼈아픈 반성을 통한 숭고한 용서에 있음을 이 장대한 서사시는 묵묵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8. 길 가르기 이승과 저승의 분리, 그리고 역사적 트라우마의 해방

시왕의 엄정한 재판을 거쳐 비로소 서로의 억울함과 죄업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된 원혼들은 이제 길 가르기라는 장엄한 이별의 의식 앞에 섭니다. 무속 신앙에서 길 가르기란 산 자가 뻗어나갈 이승의 길과 죽은 자가 떠나가야 할 저승의 길을 명확하게 분리하여 열어주는 행위입니다. 무당이 흰 천을 양 갈래로 가르며 산 자는 산 자의 세계로,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세계로 돌아갈 것을 엄숙하게 선포하는 이 순간은, 얽매임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상징합니다. 소설 손님에서 이 길 가르기는 신천 양민 학살이라는 끔찍한 역사적 트라우마에 갇혀 있던 생존자와 희생자 모두가 마침내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 각자의 시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이념의 광풍이 몰아쳤던 신천의 비극은 죽은 자들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이 과거의 끔찍한 기억, 즉 이념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죽은 자들의 원한을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했기 때문에 지속되었습니다. 류요섭 목사의 형 요한은 평생을 반공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자신 안에 내재된 학살자의 기억을 정당화하려 발버둥 쳤고, 북에 남은 생존자들 역시 미제 승냥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상처를 끊임없이 덧내며 체제 유지의 동력으로 삼아왔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비극이 현재의 삶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오류의 무한 루프였습니다. 길 가르기는 바로 이 파괴적인 순환 고리를 끊어내는 거시적인 결단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이 길 가르기의 과정을 일종의 고도화된 심리적, 역사적 제어 시스템의 작동으로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라는 엄청난 에너지를 무조건 억압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시하고 충분히 애도한 뒤에 비로소 산 자의 영역과 죽은 자의 영역을 분리하여 통제 불능의 변수들을 안정화하는 것입니다. 요섭은 형의 뼛가루를 신천 땅에 뿌리며, 형의 원혼과 신천에서 죽어간 수많은 이웃들의 원혼에게 이제 그만 무거운 이념의 짐을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에 들 것을 간청합니다. 십자가를 들고 죽창을 휘둘렀던 우익 청년단의 길과, 붉은 완장을 차고 인민재판을 주도했던 좌익 청년단의 길은 이제 이곳 이승에서 영원히 닫혀야만 합니다. 그들이 걸어갔던 투쟁과 살육의 길은 외래의 손님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환상을 저승의 어둠 속으로 돌려보내는 작업이 바로 길 가르기의 본질입니다.

이 장에서 돋보이는 것은 황석영 작가가 보여주는 지독하리만치 냉철하면서도 그 밑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깔고 있는 서술 태도입니다. 작가는 이념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을 결코 미화하거나 용서의 이름으로 흐지부지 덮어버리지 않습니다. 가해자는 가해자로서, 피해자는 피해자로서 자신들의 몫으로 남겨진 고통의 무게를 철저히 감당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길 가르기를 통해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더 이상 죽은 자들의 원한을 대물림하지 않을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역설합니다. 북한 땅에 살아가는 조카들과 가족들은 과거의 피비린내 나는 기억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재의 척박한 삶을 일구어내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요섭 역시 미국에서의 안락하지만 거짓된 평안에서 벗어나, 고향 땅에서 마주한 진실을 가슴에 품고 다시 살아나가야 합니다.

길 가르기는 결코 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억하되, 그 기억이 더 이상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기억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정교한 작업입니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사상이 한반도에서 벌인 그 끔찍했던 굿판의 기억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영구히 보존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의 삶을 분열시키는 무기로 작동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선언입니다. 이념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우리는 인간의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길을 가른다는 것은 이 거대한 깨달음을 온몸으로 수용하는 행위입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매일매일 수많은 길 가르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온라인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확증 편향의 길, 특정 정치 세력이 부추기는 혐오와 분열의 길, 물질적 탐욕만이 절대 선이라고 속삭이는 극단적 자본주의의 길 등, 수많은 새로운 손님들이 제시하는 파괴적인 경로들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신천의 원혼들이 피 눈물을 흘리며 갈라냈던 그 끔찍한 이념의 길을 우리가 다시 걷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의 독립성을 유지하며 거짓된 신념의 길과 진정한 연대의 길을 끊임없이 분별해 내는 이성적이고 영적인 길 가르기의 지혜가 필수적입니다.

9. 옷 태우기 허울뿐인 이데올로기의 상징을 소각하고 맨몸의 인간을 복원하다

이승과 저승의 길이 명확하게 갈라진 후, 굿판은 망자들이 이승에서 입었던 옷과 사용했던 물건들을 불살라 저승으로 보내는 옷 태우기의 의식으로 이어집니다. 무속 신앙에서 옷을 태우는 행위는 죽은 자가 이승에 남긴 마지막 미련과 물질적 흔적을 불의 정화력을 통해 완전히 소멸시키고, 영혼이 가벼운 상태로 저승에 도달하도록 돕는 필수적인 절차입니다. 소설 손님에서 이 옷 태우기는 대단히 강력하고 다층적인 은유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타오르는 옷이란 단순히 죽은 이들의 낡은 의복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구속하고 이웃을 살육하게 만들었던 이데올로기의 외피, 즉 완장, 군복, 십자가, 그리고 계급을 상징하는 모든 허울들을 의미합니다.

옷은 인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타인과 구분 짓기 위해 걸치는 가장 일차원적인 기호입니다. 1950년 황해도 신천에서, 옷은 곧 생사를 가르는 무서운 낙인이었습니다. 누가 지주의 비단옷을 입었는지, 누가 소작농의 무명옷을 입었는지, 누가 붉은 완장을 찼는지, 누가 기독교 청년단의 제복을 입었는지에 따라 죽이는 자와 죽는 자의 운명이 순식간에 뒤바뀌었습니다. 이념이라는 낯선 손님은 한반도의 민초들에게 각자의 이데올로기에 맞는 옷을 강제로 입혔고, 사람들은 그 옷의 색깔과 형태에 따라 이웃을 악마로 규정하고 죽창을 들었습니다. 인간의 내면은 완벽하게 거세된 채, 오직 겉옷이 상징하는 진영 논리만이 세상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황석영은 옷 태우기의 불길 속으로 이 모든 파괴적인 기호들을 가차 없이 던져 넣습니다. 류요섭이 고향의 친척들과 함께 형 요한의 유품과 제수를 불태우는 장면은, 수십 년간 겹겹이 쌓여온 증오와 적대의 상징물들을 역사적 소각장에 폐기하는 장엄한 의식입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상징들은 덧없는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립니다. 이 불길은 극단적인 분열을 부추겼던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외래 사상의 완고한 교리들을 해체하고, 그것들이 결국 한반도의 현실과는 겉돌 수밖에 없었던 수입된 허상이었음을 만천하에 폭로합니다. 옷이 타들어 가는 냄새와 연기 속에서, 우리는 이념이라는 우상에 바쳐졌던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의 억울한 희생을 다시 한번 처절하게 환기하게 됩니다.

이 옷 태우기의 철학적 핵심은 외피가 소멸된 자리에 비로소 벌거벗은 맨몸의 인간이 드러난다는 데 있습니다. 좌익과 우익의 옷, 가해자와 피해자의 옷을 모두 벗어 던졌을 때, 남는 것은 이데올로기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살아서 밥을 먹고 가족을 사랑하며 평화롭게 흙을 만지고 싶었던 연약하고 순수한 인간의 본질뿐입니다. 옷을 태운다는 것은 타인을 계급, 사상, 종교라는 잣대로 재단하고 차별하는 모든 억압적인 시스템에 대한 단호한 거부입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입된 거짓된 정체성을 버리고, 가장 원초적인 인간애의 연대로 회귀하려는 강렬한 존재론적 몸부림입니다.

이 지점에서 작가의 서술은 어떤 뜨거운 감정적 폭발을 자제하면서도 심장을 울리는 묘한 리듬감을 만들어냅니다. 타오르는 불꽃을 묵묵히 응시하는 생존자들의 시선 속에는, 미움도 원망도 아닌 깊은 허무와 존재에 대한 투명한 통찰이 교차합니다. 이 거대한 역사적 비극을 겪어낸 인간들만이 가질 수 있는 거시적인 관조의 자세입니다. 내가 믿었던 사상이 절대 선이고 네가 믿었던 사상이 절대 악이라는 맹신이 불길 속에서 재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얼굴에서 나 자신의 나약함을 발견하고 연민의 감정을 품게 됩니다.

이 옷 태우기의 상징성을 현대의 알고리즘 중심 사회에 대입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분석이 가능합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디지털 공간에서 진보, 보수, 페미니스트, 반페미니스트 등 수많은 해시태그와 프로필이라는 현대판 사상적 옷을 걸치고 서로를 향해 맹렬한 사이버 학살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소설 손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지금 굳건하게 입고 있는 그 이데올로기의 갑옷을 모두 벗어 불태워버린다면, 당신 안에는 어떤 인간적인 온기가 남아있습니까? 상대를 향한 공격의 무기로 전락해 버린 껍데기들을 끊임없이 소각하는 정신적 옷 태우기 의식이 일상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편협한 광기의 손님에게 영혼을 잠식당할 수밖에 없음을 이 뼈아픈 역사의 장면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10. 넋반 차가운 이념을 녹이는 가장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연대

옷 태우기를 통해 이승의 모든 거짓된 허울과 이념의 찌꺼기들을 정화한 후, 굿판은 마침내 가장 엄숙하면서도 따뜻한 의식인 넋반으로 접어듭니다. 넋반은 진오귀굿의 거의 마지막 단계로, 저승으로 떠나갈 영혼들을 위해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놓고 대접하는 일종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이 넋반상 앞에서는 이승에서의 모든 신분, 원한, 죄업이 일시적으로 정지되며, 오직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가장 원초적이고 생명 친화적인 행위만이 남게 됩니다. 황석영 작가는 이 넋반의 장면을 통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거대한 두 세계사적 담론이 남긴 핏빛 상처를 치유하는 궁극적인 해독제로, 이데올로기가 아닌 밥의 철학을 제시합니다.

해방 이후 신천을 휩쓸었던 비극의 근저에는 모순되게도 더 잘 먹고 더 평등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지주의 쌀통을 빼앗아 빈농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물질적 평등의 약속이었고, 기독교 역시 현실의 빈곤을 구원해 줄 영적인, 혹은 서구식 근대화라는 물질적 축복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이 두 수입된 사상은 밥을 나누는 방식에 있어서 철저하게 배타적이었습니다. 내 이념에 동조하는 자들하고만 밥을 먹고, 반대하는 자들의 밥그릇은 빼앗거나 엎어버려야 한다는 적대적 분배의 논리가 학살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념이 밥 위에 군림하는 순간, 밥은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 아니라 죽음을 부르는 무기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넋반은 다릅니다. 이 상 위에 차려진 음식에는 좌우의 이념도, 천당과 지옥의 구별도 없습니다. 류요섭이 고향의 친척들과 함께 정성스레 차려낸 넋반 앞에는 요한의 원혼도, 일랑의 원혼도, 미군 폭격에 죽어간 아이의 영혼도 우물에 던져져 죽은 아낙네의 영혼도 모두 평등하게 모여듭니다. 살아서는 서로의 피를 마셔야 직성이 풀렸던 원수들이, 죽어서 비로소 한 상에 둘러앉아 고향의 땅에서 자란 식재료로 만든 밥과 국을 함께 흠향합니다. 황석영은 이 소박한 밥상의 이미지를 통해, 서구의 거창한 근대 이성이나 변증법적 유물론으로도 풀어내지 못했던 한반도의 끔찍한 족쇄를, 밥을 나누어 먹는 우리 민족 고유의 끈끈한 공동체적 정서로 녹여냅니다.

이 넋반 장의 문장들은 이전에 등장했던 참혹한 학살이나 치열한 이념 논쟁의 서술과는 확연히 다른, 깊고 고요하며 따뜻한 울림을 지닙니다. 이념은 머리에서 나와 타인을 정죄하는 차가운 무기이지만, 밥은 땅에서 피어나 서로의 체온을 데워주는 뜨거운 생명수입니다. 요섭이 북한의 핏줄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눈물을 삼키는 장면은, 수십 년간 끊어져 있던 민족의 혈맥이 다시 이어지는 숭고한 순간입니다. 그들이 나누는 것은 단순한 탄수화물이 아니라, 수천 년간 이 땅의 민초들이 외세의 침략과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남게 했던 그 질긴 생명력의 연대입니다. 가해자의 동생과 피해자의 자손이 한 상에서 밥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화해의 성사(Sacrament)인 것입니다.

넋반은 이념적 대립이라는 복잡하고 답이 없는 고차 방정식을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인 상수로 환원시켜 버리는 위대한 문학적 해법입니다. 아무리 고도화된 정치적 타협이나 세련된 외교적 수사라 할지라도, 서로를 적대시하는 양 극단이 한 공간에서 무장 해제된 상태로 밥을 나누어 먹는 이 오가닉한 행위의 힘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현대 사회의 심각한 양극화 현상을 치유하기 위한 궁극의 솔루션 역시, 관념적인 토론장이나 법정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의 공간에서 밥 한 끼를 나누며 상대방이 나와 똑같이 배고픔과 슬픔을 느끼는 평범한 인간임을 확인하는 그 원초적인 교감의 장을 회복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11. 뒤풀이 거대한 굿판의 막을 내리고, 다시 척박한 현실의 대지 위로

모든 원혼들이 이승의 한을 풀고 저승의 길로 떠나간 후, 길고 험난했던 진오귀굿은 비로소 뒤풀이라는 맺음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무당과 참석자들이 굿판을 정리하며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이 뒤풀이는, 축제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소설 손님에서 뒤풀이는 며칠간의 숨 가빴던 북한 고향 방문을 마치고 다시 일상의 삶이 기다리는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 류요섭의 귀환과 맞물려 전개됩니다. 거대한 역사의 망령들과의 대면이라는 영적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살아남은 자들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이 뒤풀이의 공간에서 우리는 묘한 카타르시스와 동시에 깊은 쓸쓸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굿판을 통해 억눌렸던 역사적 진실을 대면하고 원혼들을 위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반도를 가로지르고 있는 분단의 철조망이 당장 걷히거나 남북의 적대적 현실이 마법처럼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북에 남은 요섭의 가족들은 여전히 통제된 사회 체제 속에서 가난하고 힘겨운 일상을 견뎌내야 하며, 요섭 역시 미국이라는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이방인의 삶을 이어가야 합니다. 황석영 작가는 결코 값싼 해피엔딩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는 굿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정화하는 심리적 치유의 완성은 보여주지만, 현실의 물리적 모순은 여전히 남겨진 자들이 치열하게 부딪히고 풀어가야 할 현재 진행형의 과제임을 냉정하게 직시합니다.

그러나 이 뒤풀이를 맞이하는 요섭의 내면은 고향에 오기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습니다. 미국에서 그를 짓누르던 원인 모를 불면증과 우울증, 그리고 형 요한이 남긴 끔찍한 죄책감의 망령들은 굿판의 소각장을 거치며 비로소 그 무게를 잃었습니다. 그는 이제 기독교라는 서구적 세계관의 틀로 고향의 비극을 일방적으로 재단하지 않으며, 이념의 승패라는 얄팍한 논리에 매몰되지도 않습니다. 그가 미국으로 가져가는 것은 거창한 통일의 청사진이나 이데올로기의 승전보가 아니라, 신천 땅에 묻혀 있는 무수한 생명들의 억울한 죽음과, 그 잿더미 위에서도 끈질기게 밥을 짓고 살아가는 북녘 핏줄들의 따뜻한 체온입니다. 이것은 어떤 강고한 이데올로기보다도 강인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힘에 대한 깊은 경외감입니다.

심화 및 조언, 나만의 사유 한 스푼

지금까지 황석영 작가의 '손님'을 통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외래 사상이 우리 땅에서 빚어낸 비극과, 그것을 치유해가는 굿판의 열두 마당을 깊이 있게 살펴보았습니다. 책장을 덮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뻐근해지면서도 묘한 정화(Catharsis)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소설이 단지 과거의 아픔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끌어안으려는 뜨거운 인간애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공간이 지닌 운명의 무게를 다시금 절감하게 됩니다. 해방 공간에 들이닥쳐 우리 민족을 도륙했던 그 무서운 손님들은 비록 그 형태는 바뀌었을지언정,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 자본의 논리, 혹은 극단적인 진영 이기주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다시 이 무서운 손님들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두 번째, 세 번째 신천 학살을 저지를 수 있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이 소설이 보여주는 진오귀굿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종결짓는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라, 매 시대마다 새롭게 출몰하는 괴물들에 맞서 우리 내면의 폭력성과 편협함을 씻어내기 위해 상시로 가동해야 하는 영원한 정화 시스템이 되어야 합니다.

황석영 손님은 한국 현대 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웅장하고 깊이 있는 성취 중 하나입니다. 작가는 거시적인 역사적 통찰력과 미시적인 인간의 고통을 직조해 내는 압도적인 필력으로, 이념이라는 허상이 인간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 본연의 생명력이 그 파괴를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는지를 완벽하게 증명해 보였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뒤풀이의 여운에 잠길 때, 우리는 차가운 이성을 넘어선 어떤 뭉클하고 묵직한 진동을 가슴속에서 느끼게 됩니다.

이 모든 굿판의 궤적을 통과하며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은, 역사적 상처라는 복잡다단한 텍스트를 다층적 시각과 절제된 사유로 해부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이념의 날 선 분극을 넘어 생명에 대한 존중과 공동체적 책임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윤리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과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아직도 현재를 흔드는 살아 있는 구조입니다. 우리는 그 구조를 감정의 격랑 속에서 소비할 것이 아니라, 냉철한 분석과 성찰을 통해 해체하고 다시 배열해야 합니다. 상처는 봉인한다고 사라지지 않으며, 외면한다고 치유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복합적인 층위를 정면으로 직시할 때에만, 우리는 분열을 넘어선 공공의 가치를 재정립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비극은 늘 외부의 적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부의 공포, 증오, 오해가 맞물리며 증폭될 때 비로소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행해야 할 작업은 기억의 재연이 아니라 기억의 재해석입니다. 감정의 반복이 아니라, 구조의 이해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처를 또 하나의 분열 도구로 사용하는 대신, 공동의 책임을 자각하는 성숙한 시민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상처를 에너지로 전환하는 통찰, 즉 분열의 잔해 위에서 공동체의 윤리를 다시 세우는 창조적 전환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적 고통을 미래의 자산으로 바꾸는 가장 정제된 방식이며,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는 자로서, 더 이상 낯선 손님의 장단에 맞추어 피 묻은 칼춤을 추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기억은 복수의 연료가 아니라 성찰의 자산이어야 하며, 상처는 증오의 무기가 아니라 연대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역사라는 굿판을 지나 진정한 공동체의 마당으로 걸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타자를 향한 깊은 이해와 포용의 시선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섣부른 심판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그 시대의 아픔 속에 내던져진 평범한 인간 군상들의 나약함과 슬픔에 깊이 공명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도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맹목적인 폭력의 가해자가 되거나 무기력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서늘한 자각. 바로 그것이 이 위대한 문학 작품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값진 선물이자, 차가운 지성을 넘어서는 성숙한 역사 인식의 출발점일 것입니다.

황석영 손님 핵심 요약

비극의 씨앗: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외래 사상이 한반도에 이식되며 빚어낸 끔찍한 돌연변이 현상 고발
황해도 신천 학살: 이념을 핑계로 이웃 간에 자행된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의 실체를 정면으로 직시
열두 마당의 굿판: 부정풀이부터 뒤풀이까지, 억울한 원혼들을 달래고 이승의 맺힌 한을 풀어내는 문학적 진혼곡
주제 의식: 이분법적 이념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 본연의 연민과 공감을 통해 도달하는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메시지

자주 묻는 질문 (FAQ)

Q: 책 제목인 '손님'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나요?
A: 과거 우리 조상들이 천연두(마마)를 칭하던 은어입니다. 소설에서는 한반도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와 민족에게 끔찍한 해악을 끼친 두 가지 이념, 즉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Q: 왜 목차를 무당의 굿판 형식으로 구성했나요?
A: 이념 대립으로 희생된 영혼들의 깊은 상처는 서구적인 논리나 재판으로는 온전히 치유될 수 없다고 작가는 보았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경계 없이 만나 억눌린 한을 마음껏 풀어내는 한국 전통의 '굿'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문학적 치유의 형식이었기 때문입니다.
Q: 황해도 신천 학살 사건은 어느 쪽의 책임인가요?
A: 황석영 작가는 이 소설에서 좌우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권력의 공백기 속에서 공산주의 계급 투쟁과 기독교의 십자군적 배타성이 맞물려 양측 마을 주민들이 서로를 잔혹하게 학살한 쌍방의 맹목적인 비극임을 강조합니다.
Q: 결말에서 요섭이 유골을 미국으로 가져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유골의 절반을 고향에 묻고 절반을 다시 가져가는 것은, 끔찍했던 과거의 역사를 결코 망각하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몫으로 짊어지고 가겠다는 무거운 책임감과 속죄의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이념의 벽을 허물고 인간에 대한 따뜻한 온기를 되찾는 데 이 독서 노트가 작은 보탬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책에 대해 더 깊은 감상이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 댓글로 남겨주세요.

『손님』/ 황석영 지음 / 휴이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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