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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coder 심층 독서 (세상의 해독)

​아니 에르노 '세월':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관통하는 집단 자서전의 힘

by 소음 소믈리에 2025.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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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세월: 개인의 기억이 어떻게 시대의 역사가되는가? 아니 에르노가 남긴 일생의 역작 『세월』을 통해,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프랑스 현대사를 관통하는 집단적 기억의 흐름을 정교하게 추적합니다. '나'를 지우고 '우리'를 세운 이 특별한 자서전적 기록이 우리에게 던지는 실존적 질문들을 만나보세요.

우리는 흔히 삶을 '나'라는 개인적인 서사로 기억하곤 합니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세월』을 펼치는 순간, 우리가 가졌던 그 견고한 자아의 경계는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해요. 이 책은 한 여성이 살아온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라, 그 시대를 함께 살아낸 모든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거대한 합창과도 같습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그 전율은, 마치 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나 자신의 파편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답니다. 

에르노는 이 책에서 결코 '나(Je)'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녀' 혹은 '우리'라는 3인칭과 1인칭 복수를 사용하여, 개인의 사적인 경험을 사회학적 층위로 끌어올립니다. 전쟁 직후의 핍절함부터 68혁명의 열기,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공허함까지 아우르는 이 방대한 기록은 독자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 그 자체를 체감하게 만듭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방식의 서술은 처음엔 낯설 수 있지만 곧 그 매력에 깊이 빠져들게 될 거예요.

 

1. 1940년대: 전쟁의 잔해와 침묵 속에서 피어난 유년기 

이야기는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됩니다. 아니 에르노는 독자를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깔린 프랑스의 노르망디로 초대합니다. 이 시기의 기억은 풍요로운 서사보다는 파편화된 이미지와 감각으로 전달되죠. 전후의 결핍은 단순히 물자의 부족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곧 언어의 결핍이자 기억의 침묵이기도 했어요. 어른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상세히 설명하기보다는 그저 "그때는 그랬지"라는 모호한 말로 입을 닫곤 했습니다.

에르노가 묘사하는 1940년대의 풍경은 습하고 어둡습니다. 아이들은 식탁 아래에서 어른들의 은밀한 대화를 엿듣고, 죽음과 생존이 종이 한 장 차이였던 시대를 감각적으로 체득합니다. 이 시기 '우리'라는 주체는 생존을 위해 결속된 집단이었으며, 개인의 욕망은 공동체의 안녕 뒤로 숨겨져야만 했습니다. 저자는 당시의 음식을 묘사할 때조차 그 투박한 질감을 살려내어, 독자가 그 시절의 가난을 머리가 아닌 피부로 느끼게 합니다.

아니 에르노의 한 마디!
에르노는 1940년대를 서술할 때 '무지'와 '순응'을 강조합니다. 이는 전쟁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사회 전체가 선택한 방어 기제였음을 작가는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아이들에게 미래는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종교적 엄숙주의와 가부장적인 질서가 지배하던 교실과 가정에서, 에르노는 자신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이전의 태동기를 세밀하게 기록합니다. 이 부분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계급적 뿌리를 인식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회학적 보고서와도 같습니다.

 

2. 1950년대: 교육을 통한 계급 이동과 여성의 갈등 

1950년대에 접어들며 서사는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합니다. 전후 복구가 이루어지고 소비 사회의 초기 징후들이 나타나죠. 하지만 에르노에게 이 시기는 계급적 균열을 목도하는 고통스러운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교육을 통해 노동 계급인 부모의 세계를 벗어나 부르주아적 가치관을 학습하게 된 그녀는, 집안에서 쓰던 투박한 사투리와 학교에서 배우는 세련된 불어 사이에서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습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적인 도덕 관념입니다. 순결과 정숙이 지상 과제였던 사회에서 젊은 여성들의 욕망은 철저히 통제되었습니다. 에르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느끼는 낯섦, 남성들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는 자신의 신체를 매우 건조하고 객관적인 문체로 서술합니다. 감정 과잉을 배제한 그녀의 문장은 오히려 독자의 가슴을 더 시리게 파고듭니다.

50년대의 주요 키워드 

  •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등장과 새로운 유행가의 확산
  • 계급 상승의 사다리로서의 고등 교육
  • 여성에게 강요된 가사 노동과 정숙의 이데올로기

작가는 부모의 손때 묻은 가게와 자신이 탐독하는 문학 서적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며, 지식이 어떻게 개인을 고립시키는지를 탐구합니다. 이는 에르노 문학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계급적 배신감'의 단초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면서까지 앞으로 나아가야 했던 그 세월의 무게를 '우리'라는 보편적인 서사로 치환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3. 1960년대: 욕망의 해방과 68혁명의 파도 

드디어 1960년대입니다. 이 시대는 그야말로 격동 그 자체였습니다. 비틀즈의 음악이 흐르고,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며, 무엇보다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에르노는 당시 프랑스 사회를 휩쓸었던 68혁명의 공기를 아주 생생하게 포착해 냅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기존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던 그 뜨거웠던 열기를 말이죠.

하지만 에르노의 카메라는 거시적인 정치 현장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녀는 혁명의 열기가 어떻게 개인의 침실과 부엌까지 침투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피임약의 보급은 여성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여성들은 자신의 몸과 삶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죠. 하지만 작가는 이 모든 변화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소외를 잊지 않습니다. 혁명의 구호 아래에서도 여전히 가사 노동을 전담해야 했던 여성들의 모순된 현실을 꼬집습니다.

1968년 5월 프랑스 학생·노동자 시위 관련 사진 모음 https://www.gettyimages.com/photos/may-1968-events-in-france

주의하세요!
68혁명은 단순한 정치적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에르노는 이 시기를 지나며 언어가 어떻게 변질되었고, 이상주의가 어떻게 상업주의에 포섭되었는지를 날카로운 문체로 비판합니다.

60년대 말의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침묵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토론하고, 저항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습니다. 에르노는 이 시기의 서술에서 문장의 속도를 높이며, 마치 영화의 몽타주 기법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상을 나열합니다. 알제리 전쟁에 대한 기억과 드골 정부의 몰락, 그리고 새롭게 형성된 청년 문화의 풍경들이 교차하며 독자를 시대의 한복판으로 몰아넣습니다.

 

4. 1970년대: 결혼과 육아, 그리고 페미니즘의 부상 

1970년대의 에르노는 한 명의 어머니이자 아내, 그리고 교사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시기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이데올로기가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는 지점입니다. 60년대의 뜨거웠던 혁명 정신은 어느덧 일상의 단조로움 속으로 잦아듭니다. 냉장고, 세탁기, 진공청소기와 같은 가전제품들이 행복의 척도가 되고, 중산층의 삶은 정형화되어 갑니다.

에르노는 결혼 생활이 여성의 자아를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아주 냉정하게 묘사합니다. 남편의 성공을 뒷바라지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나'라는 주체는 점점 희미해져 가죠. 하지만 이 시기 프랑스 사회를 흔들었던 페미니즘 담론은 그녀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으며 자신의 처지를 객관화하고, 낙태 합법화 운동에 참여하며 연대하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구분 70년대의 사회적 풍경
소비 문화 슈퍼마켓의 확산과 상품의 범람
여성 인권 낙태 합법화 및 이혼 절차의 간소화
가족 형태 핵가족화와 개별 주거 공간의 중시

이 시기의 글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일상의 사소한 물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에르노의 시선입니다. 그녀는 광고 전단지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이름을 나열함으로써, 한 시대의 공기를 보존합니다. 개인적인 고통은 시대의 징후로 해석되고, 그녀의 사적인 일기장은 역사의 주석이 됩니다. 70년대는 화려한 구호는 사라졌을지언정, 여성들의 내면에서는 가장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책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5. 1980년대: 이미지의 지배와 정치적 환멸 

80년대는 미테랑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화려하게 시작되었지만, 곧이어 정치적 환멸이 찾아온 시대였습니다. 좌파 정부에 가졌던 장밋빛 기대는 현실적인 경제 위기 앞에서 무너졌고, 사람들은 점차 거대 담론보다는 개인의 안락함과 소비에 몰두하게 됩니다. 에르노는 이 과정을 '이미지의 시대'로 규정합니다. 텔레비전 화면 속의 화려한 영상들이 실재를 대체하고, 사람들은 스크린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하죠.

작가는 이 시기 중년이 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합니다. 아이들은 자라 집을 떠나고, 부모님은 노쇠해져 갑니다. 개인적인 상실감은 시대의 권태와 맞물려 묘한 우울을 자아냅니다. 에르노는 당시 유행하던 브랜드 이름이나 유행어들을 끊임없이 나열하는데, 이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필사적인 시도로 느껴집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소모되고 잊히는 시대에서 기록만이 유일한 저항 수단이었기 때문이죠.

80년대의 기억 계산기 

당신이 80년대를 추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요?

 

80년대의 서술에서 에르노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광고의 주인공처럼 느끼기 시작했다"라고 고백합니다. 진정성은 사라지고 세련된 취향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사소한 즐거움과 일상의 질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녀의 글은 차갑지만, 그 속에는 시대와 함께 늙어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이 담겨 있습니다.

 

6. 1990년대: 신자유주의와 정체성의 파편화 

1990년대에 들어서며 세상은 더욱 빠르게 돌아갑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되었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이었습니다. 인터넷이 보급되고 휴대폰이 보급되면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변화했습니다. 에르노는 이 시기를 "모든 것이 현재화된 시대"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기억은 데이터로 저장되지만, 정작 그것을 반추할 시간은 사라져 버린 것이죠.

에르노는 90년대의 서술에서 더욱 파편화된 문장들을 사용합니다. 이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글로벌 경제의 흐름 속에서 개개인은 하나의 부품처럼 취급되고, 공동체의 유대감은 더욱 약화됩니다. 작가는 자신의 몸이 노쇠해가는 과정과 사회가 디지털화되는 과정을 대조하며,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마지막 기록을 남깁니다.

기억하세요!
에르노에게 기록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의 우리를 규정하는 수많은 권력의 네트워크를 해체하고, 그 속에서 소외된 인간의 얼굴을 찾아내는 투쟁입니다.

걸프전과 같은 비극적인 전쟁조차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마치 게임처럼 소비되던 그 시절, 에르노는 다시 한번 '우리'라는 단어를 통해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거대한 가속도의 시대에 우리가 지켜내야 할 인간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그녀의 서술은 갈수록 단호해지며, 독자에게 시대의 방관자가 아닌 목격자가 될 것을 촉구합니다.

 

7. 2000년대: 노년의 시점과 기억의 영속성 

책의 후반부인 2000년대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에르노는 이제 노년의 여성이 되어 자신의 지난 세월을 되돌아봅니다. 9.11 테러와 같은 전 지구적인 사건들이 발생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엄습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절망하기보다는 쓰는 행위 그 자체에서 구원을 찾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임을 알고 있기에, 더욱 필사적으로 글을 씁니다.

마지막 장에서 에르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자신이 떠난 뒤에도 남겨질 기억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사라지겠지만, '우리'가 공유했던 그 세월의 기록은 텍스트로 남아 다른 이들의 기억과 만날 것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성취는 한 개인의 삶을 인류 보편의 역사로 확장한 데 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에르노를 타인으로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녀의 기억이 곧 나의 기억이 되고, 우리의 역사가 되기 때문이죠.

『세월』 핵심 요약 카드
핵심 전략: '나'를 지우고 '우리/그녀'로 서술하는 오토소시오비오그라피
주요 대상: 1940년대 전후 세대부터 디지털 시대를 사는 현대인까지
문학적 성취:
개인의 기억 + 사회학적 분석 + 역사적 연대기 = 집단 자서전
전달 메시지: 사라지는 세월 속에서 기록만이 삶의 실존을 증명한다.

 

자주 묻는 질문 ❓

Q: 아니 에르노의 『세월』이 왜 특별한가요?
A: 전통적인 자서전의 형식인 '나'를 버리고, 사회학적 관점에서 '우리'의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의 경험을 인류 보편의 역사로 승화시키는 독창적인 방식입니다.
Q: 프랑스 역사를 잘 몰라도 읽을 수 있나요?
A: 네, 가능합니다. 구체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음식, 유행어, 가전제품 등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시대를 묘사하기 때문에 인간 보편의 성장과 변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Q: 이 책의 문체는 어떤 특징이 있나요?
A: 에르노는 '칼 같은 문체(Écriture plate)'로 유명합니다. 감정을 억제하고 사실을 건조하게 나열함으로써 오히려 독자에게 더 깊은 울림과 객관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을 읽는다는 것은, 거대한 시간의 강물에 몸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 책을 통해 여러분도 자신의 삶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세월'의 조각들을 다시 한번 소중히 들여다보셨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는지 깨닫게 되는 놀라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80년대나 90년대는 어떤 색깔이었나요?

『세월』 / 아니 에르노 지음 / THE CIRCLE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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