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 당신의 삶이 매일 똑같은 3가지 이유
최진석 교수의 철학적 사유가 담긴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은, 타인의 기준에 갇혀 매일 똑같은 삶의 궤도를 도는 우리에게 서늘한 각성을 안겨줍니다. 가족이 각별한 애정을 담아 권해준 이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 제 내면을 스치고 지나간 일차적인 감정은 기묘한 지적 거부감이었습니다. 기존에 제가 익숙하게 소비해 오던 철학서나 인문학 서적들이 보여주던 치밀하고 건조한 연역적 논리 전개, 혹은 독자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에세이의 문법과는 사뭇 다른 호흡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진석 교수의 문장은 물 흐르듯 유려하면서도 날카로운 비수처럼 인식의 허를 찔렀고, 사유의 논리는 정해진 궤도를 이탈하여 시적인 직관으로 미끄러졌으며, 제가 지금껏 굳건한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삶의 견고한 형식들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낯선 방식의 철학적 전개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처음에는 방어기제가 작동하여 활자가 시야를 겉돌았으나, 페이지를 한 장씩 무겁게 넘길수록 그 낯설고 난해해 보이던 문맥의 이면에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통찰의 뼈대가 서서히, 그러나 압도적인 위용으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저는 얄팍한 저항을 완전히 멈추고, 그 서늘하고도 묵직한 사유의 파도에 온몸을 내맡긴 채 깊이 침잠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자기 자신이 꽤나 주체적이고,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인 존재라고 굳게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상업적인 광고나 대중매체의 선동에 맹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는다, 나는 타인의 얄팍한 가스라이팅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나의 정치적 선택과 일상의 소비는 오직 나 자신의 합리적인 이성과 주관에 의해 자율적으로 결정된다고 자부합니다. 저 또한 그 오만한 믿음의 대열에서 결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예리하게 벼려진 철학적 사유의 메스를 들어, 바로 그 견고한 자기 확신 자체가 우리가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관성에 얼마나 철저하게 포섭되어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징후임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우리가 사회적 규범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오판하는 바로 그 맹점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이미 가장 깊숙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뼈아픈 진실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타인이 주입한 욕망의 모방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순간의 전율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 지적인 충격과 뼈저린 실존적 자각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치열한 독서의 기록이자 사유의 확장판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마주하게 되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공허함,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강박적인 삶의 선택들, 그리고 현대 사회 시스템 곳곳에 보이지 않는 곰팡이처럼 스며들어 있는 구조적 부조리들을 해독해 내기 위해, 저는 잠시 저자의 차갑고 예리한 철학적 안경을 빌려 써보고자 합니다. 이 사유의 안경은 결코 다정하게 세상을 미화하거나 값싼 위로를 건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감추고 싶은 치부와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들을 잔혹할 정도로 냉정하고 또렷하게 직시하도록 강제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지독한 냉정함 덕분에,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두꺼운 화장으로 덮어두려 했던 현실의 진짜 뼈대와 존재의 민낯이 비로소 명징하게 시야에 들어오게 됩니다.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존재이기에 필연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지독한 나약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그 심연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우리 스스로 촘촘하게 엮어낸 거대한 환상의 그물망들. 저는 그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섣불리 단죄하거나 오만하게 비웃기보다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깊고 묵직한 이해의 시선으로 응시하며 이 아득하고도 복잡한 이론의 숲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걸어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의 의식을 둘러싼 견고한 방어막을 하나씩 해체하는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1. 우리는 왜 바뀌지 않는가
우리가 지독할 정도로 삶의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고 변화에 실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개인의 의지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익숙함'이라는 거대한 중력장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며, 능동적인 사유를 멈춘 채 타인의 욕망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뇌와 육체는 본능적으로 관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에너지를 보존하려는 극단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제 걸었던 푹신하고 안전한 길을 오늘 아무런 의심 없이 다시 걷고, 어제 무의식적으로 내렸던 결정을 오늘 그대로 반복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의 신경계는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며 심리적인 위안과 극도의 안정감을 획득합니다. 저자는 서두에서 바로 이 익숙함에 갇힌 인간의 실존적 위기를 매우 강도 높고 예리하게 진단해 냅니다. 우리는 늘 입버릇처럼 혁신을 부르짖고 낡은 자아로부터의 탈피를 갈망한다고 소리 높여 말하지만, 도대체 왜 우리의 현실적인 삶은 늘 지루한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는 것일까요. 그 근원적인 이유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지적 호기심이나 더 나은 자아를 향한 성장의 열망보다, 현재의 현상 유지가 가져다주는 얄팍한 안락함을 단 한 줌이라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원초적이고 거대한 공포가 우리를 훨씬 더 강하게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익숙함이라는 것은 혹한의 겨울밤에 덮고 있는 따뜻하고 푹신한 담요 같아서 당장은 안락하게 느껴지지만, 그 밑에 너무 오래 웅크리고 머물다 보면 결국 생명력의 근원인 근육을 쇠약하게 만들고 우리의 영혼을 서서히 질식시키는 가장 치명적인 마취제로 돌변하고 맙니다. 기존에 형성된 가치관과 사회가 부여한 질서에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순응하는 삶은 외부 세계와의 어떠한 철학적 마찰열도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그저 거세게 흘러가는 강물에 아무런 저항 없이 몸을 내맡긴 채 부패해 가는 죽은 나뭇가지처럼, 시대가 정해놓은 거대한 억압의 흐름을 따라 속절없이 표류하게 될 뿐입니다.
이처럼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익숙함의 덫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남의 기준으로 사는 삶이라는 비극적인 연극 무대로 인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따뜻한 태를 벗어나 세상에 던져지는 그 순간부터 가정의 훈육, 학교의 획일화된 교육 과정,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는 거대하고도 정교한 이데올로기적 생산 장치들에 의해 끊임없이 주조되고 강제적으로 규정당합니다. 명문 대학 진학, 대기업 취업, 번듯한 아파트 마련, 그리고 매끄러운 가정의 구축이라는 극도로 획일화되고 폭력적인 기준표가 마치 우주를 관통하는 절대적인 진리라도 되는 양 우리의 뇌리 깊숙한 무의식의 영역에 강박적으로 각인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내면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서 아주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진짜 영혼의 목소리, 즉 나의 순수한 욕망에는 철저하게 귀를 닫아버린 채, 오직 외부의 거대한 확성기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타인의 지시와 사회적 평가에만 모든 생체 촉각을 곤두세우는 참으로 기형적인 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무엇에 매료되고 사랑을 느끼는지, 나의 심장 박동을 요동치게 만드는 본질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고독하게 묻고 탐구하는 시간은 완벽하게 생략된 채, 오직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번듯하고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해 줄지에 남은 생애의 모든 에너지를 처절하게 소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주체성의 상실을 넘어, 자본과 타인의 폭력적인 시선 앞에 내 존재 자체를 헐값에 매각해 버리는 철저한 자기 소외 현상이며, 단 한 번뿐인 고귀한 내 삶의 무대에서 나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초라한 엑스트라나 소품으로 전락해 버리는 가장 슬프고 참혹한 실존적 사태입니다.
이토록 맹목적으로 남의 기준에 얽매여 살아가는 수동적인 삶의 캄캄하고 척박한 기저에는, 바로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라는 가장 무서운 정신적 질병이 암세포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기서 철학이 묵직하게 강조하는 생각이란, 단순히 외부의 흩어진 지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암기하거나 일상적인 업무 처리를 위해 뇌의 시냅스를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단순한 정보 처리 작용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기존에 당연하다고 주어져 있던 모든 사회적 전제들을 밑바닥부터 파헤쳐 의심하고, 화려하게 포장된 현상 너머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감춰진 보이지 않는 구조적 이면을 서늘하게 꿰뚫어 보며, 세상과 사물을 온전히 해석해 내는 자신만의 고유하고 단단한 철학적 잣대를 정립해 나가는 매우 고통스럽고도 고독한 사유의 투쟁을 의미합니다. 과거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전범 아이히만을 면밀히 관찰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섬뜩한 개념을 경고했듯이, 주체적이고 치열한 사유의 부재는 곧 타인의 악의나 전체주의적인 폭력적 이데올로기에 무방비 상태로 조종당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진공 상태를 내어주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유하기를 포기한 인간은 외부의 권력 기관이나 미디어 매체에서 주입된 가짜 신념을 마치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고유하게 지니고 있었던 순수한 신념인 양 굳게 착각하게 되며, 그 정교하게 조작된 환상의 매트릭스 속에서 기이하고도 소름 끼치는 안온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토록 단단하게 고착화된 생각하지 않는 습관은 궁극적으로 삶을 대하는 모든 국면에서 질문하지 않는 태도로 굳어지며 우리를 화석화시킵니다. 갓 세상의 이치를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들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경이로움에 찬 눈빛으로 이유를 묻는 질문을 던지지만, 거대한 시스템의 순종적인 부속품으로 길들여진 어른이 되어갈수록 우리의 입술은 마치 무거운 무쇠 자물쇠가 채워진 듯 굳게 닫히고 침묵하게 맙니다.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고 튀는 행동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극도로 경직된 사회 구조 속에서,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질문은 불필요한 사회적 마찰을 일으키고 조직의 화합을 해치는 불온하고 위험한 행위로 간주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문이야말로 우리를 겹겹이 에워싼 견고한 이데올로기의 성벽에 치명적인 균열을 내고 틈새를 벌리는 가장 작지만 동시에 가장 거대한 무기입니다. 왜 나는 이 직업을 내 평생의 업으로 선택하도록 보이지 않게 내몰렸는가. 왜 나는 이런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소비 패턴에 끊임없이 집착하며 허기를 느끼는가. 왜 나는 지금 이 순간 이런 류의 불안과 우울이라는 감정에 속수무책으로 잠식당하고 있는가. 살아 숨 쉬는 철학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고 또 물을 것을 매우 가혹하게 요구합니다. 근원적인 질문이 멈춘 바로 그 차가운 지점에서 인간의 영적, 지적 성장은 심정지 상태에 빠지며, 그 자리에 고인 물처럼 썩어가는 낡은 이념과 타인의 맹신들만이 득실거리게 됩니다. 우리는 내면의 심연을 향해 내리꽂는 벼락같은 질문을 통해서만, 비로소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주어진 텍스트의 바깥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갈 수 있는 위대한 첫걸음을 떼게 되는 것입니다.
2.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진정한 채움을 맞이하기 위한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전제 조건은 뼈를 깎는 처절한 비움의 행위입니다. 나의 정체성을 단단하게 구성한다고 굳게 믿어왔던 낡은 신념의 파편들을 용기 있게 도려내고 폐기할 때, 비로소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폭발적으로 유입될 수 있는 내면의 여백이 창조됩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물리적 법칙을 빌려오자면, 이미 탁하고 오염된 흙탕물로 가득 차서 찰랑거리는 컵 안에는, 그 어떤 맑고 영롱한 1급수의 새 물을 붓더라도 결국 기존의 오물과 섞여 다시 탁해지고 말 뿐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차원의 경이로운 생명력과 혁명적인 사유가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유입되어 자리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집착했던 낡은 것들을 가차 없이 비워내는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공간 확보 작업이 처절하게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대자연과 우주가 순환하는 불변의 진리이자, 인간의 내면이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가장 뼈아픈 작동 원리이기도 합니다. 텍스트의 2부는 바로 이 비움의 철학, 혹은 과거의 나를 향한 무자비하고도 처절한 폐기의 결단에 대해 깊고 집요하게 천착합니다.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의 얄팍한 한계를 티끌 하나 없이 명확하고 차갑게 직시하는 것은 그 험난하고도 고독한 여정의 필수적인 진입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의심 없이 맹신해 온 도덕률, 선악의 윤리적 잣대, 그리고 세속적인 성공의 방정식들은 태초부터 우주에 존재했던 영원불변의 성스러운 진리가 절대 아닙니다. 그것들은 단지 특정 시대의 패러다임과 사회 권력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적 지배 체제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대중을 관리하기 위해 정교하게 고안해 낸 일시적이고 임시방편적인 이데올로기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시대의 거대한 지형도가 지진이 난 듯 완전히 바뀌고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이 급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빛바랜 과거의 낡아빠진 지도표를 꽉 움켜쥐고 인생이라는 험난한 바다의 길을 찾으려 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이고 몽매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엄중한 철학적 맥락에서 볼 때, 현대인들이 그토록 목을 매는 안정 지향의 위험성은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 핏대 세워 경고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포식자의 위협과 예측 불가능한 자연재해 등 불확실성을 생존에 대한 가장 거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극도로 혐오하고 회피하도록 진화해 온 생물학적 특성을 혈관 깊숙이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의 이치를 들여다보면 매우 역설적이게도, 먼지 하나 흔들리지 않고 미동조차 없는 완벽한 안정이라는 것은 오직 공동묘지의 차가운 비석 아래, 즉 모든 에너지가 소멸한 죽음의 상태에서만 완벽하게 구현될 수 있는 기만적인 개념입니다. 숨을 크게 쉬고 붉은 피가 역동적으로 돌며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몰아치는 흔들림과 치열한 불안정성의 소용돌이 속에서 매 순간 아슬아슬하고 팽팽한 균형을 찾아가는 역동적이고 숭고한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인생에서 오직 고통 없는 안정만을 삶의 최고이자 유일한 가치로 지향하고 매달리는 태도는, 곧 삶이 뿜어내는 다채롭고 찬란한 역동성을 내 손으로 스스로 거세하고 자신을 안전한 유리 진열장 속의 먼지 쌓인 박제로 만들어버리는 끔찍한 자해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안락함을 제공하는 거짓된 환상에서 고통스럽게 깨어나, 차갑고 매서운 진실의 비바람이 몰아치는 광야로 당당하게 두 발을 내딛을 것을 가혹하게 촉구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서늘하기 그지없습니다. 안정이 주는 얄팍하고 달콤한 마약의 기운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누군가가 고의로 지어놓은 안전하고 비좁은 울타리 안에서 배부르게 사육되다 이름 없이 생을 마감하는 가축의 슬픈 운명을 결단코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가장 버려내기 고통스럽고 끈질기게 발목을 잡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과거 경험에 대한 미련과 집착입니다. 과거에 이룩했던 눈부신 성공의 경험은 종종 우리의 눈을 가려 지독한 교만과 아집의 늪에 빠뜨리고, 뼈아프게 겪었던 실패의 상처는 우리의 발목에 무거운 족쇄를 채워 영원한 두려움과 회피의 감옥에 짐승처럼 가두어 버립니다. 특히 과거에 단 한 번이라도 세속적으로 달콤한 성공의 열매를 맛보고 타인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 짜릿했던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하기 위해 과거에 사용했던 방식을 맹목적으로 고수하려는 편집증적인 집착에 사로잡히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세상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빛의 속도로 쏜살같이 변화하며 우리의 멱살을 잡고 전혀 새로운 차원의 복잡한 문제들을 던져주고 있는데, 나는 10년 전, 20년 전의 화려하고 영광스러웠던 기억의 낡은 전당에 멈춰 서서 이미 유효기간이 새카맣게 지나버린 낡은 해법과 공식만을 고장 난 기계처럼, 혹은 지능 없는 앵무새처럼 무한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아쉬움이나 회고적 감성이 아니라 인간의 뇌가 저지르는 치명적인 지적 게으름이며, 시간의 도도하고 무자비한 흐름을 거스르려는 인간의 헛되고 오만한 발버둥입니다. 과거의 나는 분명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훌륭하게 문제를 돌파했을지 모르나, 오늘의 낯설고 이질적인 위기 앞에서 어제의 영광이 나를 구원해 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어제의 나와 냉정하고 깔끔하게 결별하는 엄숙한 애도의 의식을 치러야만, 비로소 오늘이라는 생생하고 펄떡이는 현재의 대지에 두 발을 굳건하고 단단하게 딛고 설 수 있습니다.
이 모든 파괴와 해체, 그리고 처절한 버림의 과정에서 가장 절실하게, 그리고 뼈와 살을 깎아내는 듯한 고통을 동반하며 요구되는 최고의 철학적 덕목은 다름 아닌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인정하는 숭고한 행위입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견고하게 쌓아온 자신의 신념 체계와 사리 판단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음을 남도 아닌 스스로 시인하는 것은, 자아의 가장 깊숙하고 단단한 성벽이 속절없이 폭격맞아 붕괴되는 것과 같은 끔찍하고 아득한 실존적 고통을 수반합니다. 평생을 지켜온 자존심은 산산조각 나어 흩어지고, 내가 지금껏 안전하게 구축해 온 견고한 세계관이 뿌리째 뽑혀 흔들리는 지독하고 어지러운 현기증을 홀로 고독하게 견뎌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끔찍하게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시인의 단계를 정면으로 통과하지 않고서는, 단 한 걸음의 지적 성장이나 영혼의 비약적인 도약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영원한 진리라고 굳게 믿어온 그 견고한 관념들이 사실은 지극히 편협한 편견과 왜곡된 욕망의 초라한 산물이었음을 뼈저리게 인정하는 바로 그 기적 같은 순간, 비로소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던 자아의 두꺼운 껍질에 쩍 하고 틈새가 갈라지며 그 좁은 균열 사이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경이로운 빛이 쏟아져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치명적인 오류를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패배 선언이나 백기 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 넓고 깊은 진리의 바다와 참된 앎의 끝없는 영토를 향해 진군하는 자만이 던질 수 있는,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승리의 출사표라 할 수 있습니다.
3.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명확한 타깃 설정이 부재한 추상적인 비움의 결심은 한낱 지적 유희나 자기 위안에 불과합니다. 외부의 폭력적인 시선,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확신, 내 생명 에너지를 갉아먹는 소모적인 관계망 등 일상을 거미줄처럼 촘촘히 옭아매고 있는 구체적인 허상들을 냉정하게 선별하여 잔혹하게 잘라내야 합니다.
앞선 과정들을 통해 비움과 해체의 철학적 당위성을 온몸으로 절절히 깨달았다면, 이제는 현실이라는 차가운 수술대 위에 나의 일상을 올려놓고 날카로운 메스를 겨눌 구체적이고 명확한 대상을 확정해야 할 엄중한 차례입니다. 그 살벌한 척결의 첫 번째 희생양은 단연코 남의 시선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괴물입니다. 오늘날을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 감옥, 즉 파놉티콘의 보이지 않는 감시탑 안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타인의 시선이라는 채찍질 아래 밤낮없이 자신을 검열하며 살아가는 참으로 비극적인 자발적 수감자들과 같습니다. 특히 무한대의 속도로 팽창한 SNS와 디지털 알고리즘 매체의 범람은 이러한 타인의 시선에 대한 예속을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극단적이고 병적인 형태로 몰아갔습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익명의 타인이 가볍게 누르는 무의미한 '좋아요' 버튼 하나에 영혼의 천국과 지옥을 롤러코스터 타듯 오가고, 누군가의 얄팍한 부러움과 시기 어린 시선을 찰나적으로 즐기기 위해 자신의 진실된 삶의 이면을 감추고 끊임없이 기만적으로 연출하며 화려하게 편집해 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남의 시선을 버린다는 것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속세와 거대한 담을 쌓고 기행을 일삼으며 고립되어 살겠다는 은둔주의적 도피를 의미하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그것은 내 행동을 추동하는 궁극적인 동기와 내 삶의 가치를 스스로 판단하는 척도를 더 이상 변덕스럽고 잔인한 외부 세계의 평가에 내맡기지 않고,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의 성소로 온전히, 그리고 강력하게 회수해 오겠다는 절대적인 주권 독립의 선언입니다. 지금 내가 내린 이 중대한 선택이 과연 내가 순수하게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욕망해서 하는 일인가, 아니면 세상 사람들에게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것인가. 이 날카롭고 뼈를 때리는 질문 앞에 단 한 치의 자기 기만이나 거짓도 없이 정직하게 마주 서야만, 우리는 비로소 시선의 지옥이라는 무기징역에서 벗어나 극적인 탈옥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피로한 일상에서 두 번째로 폐기 처분해야 할 낡고 고루한 유물은 바로 익숙한 방식에의 맹목적인 의존입니다. 서두에서도 반복하여 경고했듯, 인간을 지배하는 관성의 힘은 달콤한 솜사탕처럼 편안하지만 결국 영혼을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할 만큼 치명적인 독성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현실에서 달성해야 할 목적이나 본질 자체보다,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하며 내 근육과 뇌리에 새겨진 익숙한 수단과 방법론에 더 맹목적이고 강박적인 애착을 느끼곤 합니다. 이른바 수단이 목적의 자리를 거만하게 찬탈하여 군림하는 주객전도의 기이한 현상입니다. 눈앞에 쓰나미처럼 닥친 전혀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통스럽게 창의적인 방식을 창조해 내는 대신, 책장에 꽂혀 먼지가 수북이 쌓인 과거의 매뉴얼을 뒤적이며 상황에 전혀 맞지도 않는 낡은 해법을 기계적으로, 억지로 끼워 맞추려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시대의 근본적인 문법이 완전히 바뀌고 생태계의 잔혹한 룰이 재편되었다면, 나의 생각하는 방식과 행동의 패턴 역시 당연히 최신 버전으로 혹독하게 업데이트되어야만 마땅합니다. 익숙한 방식을 미련 없이 불태워 폐기한다는 것은, 나침반 하나 없이 길조차 없는 거친 정글을 온몸의 생채기를 견디며 헤쳐 나가는 극도의 불안감과 생존의 공포를 기꺼이 나의 몫으로 감수하겠다는 위대한 모험의 수락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처절하고 피눈물 나는 모험의 길고 긴 터널 끝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경이로운 지적 풍경과 내 안에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위대한 잠재력의 화산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폐기와 보존을 가르는 사유의 지표
| 가차 없이 폐기해야 할 낡은 대상 | 절치부심으로 확보해야 할 가치 | 구체적인 삶의 실천 방향 |
|---|---|---|
| 타인의 시선과 병적인 사회적 인정 욕구 | 내면의 고유한 척도와 펄떡이는 순수한 욕망 | 외부의 변덕스러운 척도가 아닌 오직 '나의 척도'로 세계를 재편할 것 |
| 과거의 얄팍한 경험칙과 먼지 쌓인 성공 매뉴얼 | 현재 상황을 직시하는 동물적이고 예리한 통찰력 | 과거 경험의 충실한 노예가 아닌, 현재를 통제하는 절대적 주인이 될 것 |
| 화석화된 이념적 도그마와 맹목적인 확신 | 유연하게 흔들리며 열려 있는 근원적 질문의 태도 | 경직된 명사형 맹신에서 벗어나, 역동적인 동사형 사유로의 과감한 전환 |
세 번째로 반드시 정조준하여 파괴해야 할 타깃은, 우리의 지성을 마취시키고 마비시키는 잘못된 확신이라는 이름의 망령입니다. 인간의 인지적 구조는 참으로 나약하고 허술하여, 지극히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정보의 조각들만으로도 거대한 믿음의 철옹성을 눈 깜짝할 새에 구축하는 데 매우 기이하고도 탁월한 재능을 보입니다. 우리 머릿속에 한 번 어떤 특정한 확신이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으면, 그 즉시 끔찍한 확증 편향의 기제가 맹렬하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기존 믿음을 든든하게 지지하고 보강해 주는 입맛에 맞는 증거들만을 집요하게 수집하며, 조금이라도 반대되는 논리나 객관적인 증거가 나타나면 그것을 온갖 궤변으로 합리화하거나 철저히 이단으로 몰아 배척해 버립니다. 이러한 자기 기만적인 절대적 확신이야말로, 타인을 억압하고 세상을 폭력적으로 재단하는 이데올로기가 기생하여 번식하기에 가장 완벽하고 비옥한 최적의 토양입니다. 진정한 앎의 심연에 도달한 지식인은, 자신이 아는 바가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우주적 관점에서 겸허하게 인정하고 언제나 외부를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두는, 매우 유연하고도 심지가 단단한 회의주의자입니다.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맹목적 확신은 작은 외부의 충격에도 산산조각이 나 파멸하지만, 갈대처럼 유연하게 흔들리는 회의와 질문하는 지성은 그 어떤 거센 폭풍우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고 살아남습니다. 최진석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사유의 정수는, 바로 이 바람의 흐름을 타는 대나무 같은 지성의 유연성을 온몸의 감각을 열어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피로하고 지친 일상에서 가장 뼈를 깎는 매서운 결단과 막대한 용기가 필요한 부분은, 바로 내 삶에 아무런 영양가를 주지 못하는 의미 없는 관계와 목적지 없이 표류하는 비효율적인 노력을 단호하게 칼로 베어 끊어내는 잔혹한 가지치기 작업입니다. 우리는 군중 속에서 혼자 남겨진다는 존재론적인 지독한 외로움을 어떻게든 회피하기 위해, 혹은 피상적이고 계산적인 인맥 네트워크가 언젠가 나에게 세속적인 성공과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헛된 미망에 깊이 사로잡혀, 자신의 유한하고 너무나 고귀한 생명 에너지를 속절없이 허공에 소진하며 무가치한 관계의 썩은 동아줄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놓지 못합니다. 더불어 그 어떤 철학적 방향성이나 본질적인 목적의식도 처참하게 결여된 채, 그저 뒤처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남들만큼 열심히'만 하는 맹목적인 기계적 노력은, 아주 값싼 자기 위안이나 마약 이상의 그 어떤 실질적 의미도 내 삶에 창출하지 못합니다. 내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극소수의 절대적 가치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온전한 영혼과 시간을 쏟아붓기 위해서는, 나머지 수많은 불필요한 잔가지들을 무자비하게 쳐내는 피 묻은 가지치기가 생존과 도약을 위해 필수불가결합니다. 인간관계의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삶의 에너지를 집중하는 노력의 에센셜리즘이야말로 밀도 높고 단단한 무적의 삶을 구축하기 위한 가장 탁월하고 아름다운 전술적 선택입니다. 우리가 두려움과 상실감을 부둥켜안고 과감히 버림으로써 최종적으로 잃게 되는 것은 기껏해야 삶의 위선적인 껍데기와 불필요한 불순물들뿐이며, 그 지독한 용광로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삶의 진정한 정수와 핵심만이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하고 명료하게 남게 된다는 숭고한 사실을 우리는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불도장처럼 새겨야만 합니다.
내 삶에서 무언가를 완전히 버려내고 끊어낸다는 것은, 단칼에 무를 자르듯 단숨에 끝나는 통쾌한 일회성의 이벤트가 절대 아닙니다. 마치 바짝 깎아놓은 손톱이 어느새 스멀스멀 다시 자라나듯, 타인의 시선과 낡은 사고의 끈질긴 관성은 매 순간 우리가 방심하고 긴장을 늦추는 틈을 귀신같이 타서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내면에 다시 침투하려 들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버림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새롭게 전투를 다짐하고 정신의 무기를 날카롭게 벼려야 하는 피 말리는 평생의 고독한 수행 과정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4.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우상의 전각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비워낸 황량하고 적막한 폐허 위에는, 철저히 나의 고유한 언어와 감각으로 직조된 전혀 새로운 삶의 웅장한 건축물이 우뚝 들어서야만 합니다. 잃어버린 근원적 질문의 힘을 회복하고, 박제된 명사에 갇힌 죽은 삶이 아닌 동사의 역동적인 삶을 선택하는 주권자의 벼락같은 결단이 폭발해야 할 결정적 시점입니다.
모든 철저한 파괴와 뼈를 깎는 해체 작업이 참혹하게 끝난 자리에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세계를 재건해야 하는 창조의 거대한 과업이 숨을 죽인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의 발목을 지독하게 잡고 있던 모든 낡고 부패한 것들을 남김없이 덜어내고 텅 빈 적막한 공터가 된 우리의 영혼의 한가운데에, 이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어떤 가치를 채워 넣어야만 참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요. 저자는 그 첫 번째이자 유일한 근원적 대안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의 완벽한 복원을 맹렬하고도 단호하게 제시합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타인의 위대한 사상, 서양 철학자들의 난해하고 복잡한 이론, 도서관에 먼지 쌓인 책에 적힌 죽은 활자들을 마치 종교적 성전처럼 앵무새처럼 달달 외우고 인용하는 것은 결단코 진정한 사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지식의 소비자일 뿐이며, 거칠게 표현하자면 타인의 지적 배설물을 주워 먹는 지적 구걸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독립적 사유는 구름 위 형이상학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두 발로 굳건히 딛고 서 있는 피비린내 나고 치열한 구체적인 삶의 진흙탕 현장에서, 자신의 뜨거운 땀과 고통스러운 눈물로 길어 올린 생생하고 펄떡이는 날것의 깨달음이어야만 합니다. 내 삶의 온도와 맥박에 맞게 소화되지 않은 남의 지식은 오히려 나의 뇌를 짓누르고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짐짝이나 지적 허영에 불과합니다. 차가운 활자의 지식을 살아 숨 쉬는 지혜의 혈액으로 치환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나의 삶'이라는 펄펄 끓는 용광로 속에 과감히 집어넣어 기존의 형체를 알 수 없게 완전히 녹여내는 치열하고도 고독한 사유의 제련 과정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그 스스로 생각하는 힘의 맷집과 근육이 단단하게 길러질 때, 우리는 비로소 외부의 거센 풍파와 변덕스러운 시대의 유행에 속절없이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심연에 깊이 박힌 굳건한 영혼의 닻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야성적이고 독자적인 사유를 맹렬하게 추동하는 가장 훌륭하고 강력한 내부 엔진은, 두말할 나위 없이 질문하는 삶의 태도를 온전히 회복하는 것입니다. 앞서 1부에서 질문하지 않고 시스템에 순응하는 노예적 태도의 치명적인 위험성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면, 이 4부의 섹션에서는 질문이 지닌 파괴적인 방법론과 그 혁명적인 위력에 대해 정밀한 논증을 전개합니다. 세상이나 권력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대답이나 획일화된 정답은 언제나 우리를 특정 이데올로기의 비좁은 틀 안에 가두고 생각의 숨통을 조이는 감옥의 마침표와 같지만, 우리가 주체적으로 날을 세워 던지는 질문은 굳게 닫혀 있던 미지의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마법의 열쇠이자, 끊임없이 진정한 앎의 지평을 향해 멈추지 않고 전진하게 만드는 강력하고 날카로운 화살표입니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 벼락같은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태나 불합리한 사회적 구조를 더 이상 내가 감내해야 할 당연한 운명으로 굴종하며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피 끓는 저항의 몸짓이며, 지금보다 더 높고 깊은 차원의 진리 영역을 향해 도약하겠다는 인간 존재 본연의 지적 갈증의 눈부신 발현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문명의 발전과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들은 언제나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하는가?" 혹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뒤집어볼 수는 없는가?"라는, 당대에는 미친 사람이나 이단아 취급을 받았던 단 한 명의 고독한 질문자로부터 거대한 불길처럼 발화되었습니다. 우리가 내면에서 솟구치는 호기심과 의심이라는 질문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고 활활 타오르게 하는 한, 우리의 삶은 결코 낡아빠진 골동품이 되거나 시대의 뒤안길에서 허무하게 부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치열한 사유의 제련과 날카로운 질문의 험난한 터널을 통과하여 우리가 마침내 두 발을 굳게 딛고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영혼의 목적지는 바로 '새로운 기준 세우기'라는 장엄한 과업입니다. 타인의 폭력적인 시선과 사회적 통념이라는 썩은 폐기물들을 말끔히 치워낸 내면의 깨끗한 공터에, 오롯이 나만의 고유한 척도와 잣대를 하늘 높이 곧게 세우는 영적 건축 작업입니다. 우리는 이제 성공이라는 단어의 기준을 타인이 침 흘리며 부러워하는 통장의 연봉 액수나 번듯한 명함에 새겨진 허울 좋은 직급이 아닌, '오늘 하루 내가 세상과 어떻게 깊이 교감하며 얼마나 충만하고 뜨겁게 나의 존재를 불태웠는가'로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를 얻었습니다. 또한 행복을 측정하는 척도를 눈에 보이는 물질적 소유의 방대한 양이나 평수의 크기가 아니라,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사유의 넓이와 삶의 경험이 주는 밀도 높은 깊이'로 완전히 재편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세워진 나만의 기준은, 속물적인 남들의 눈에 비치기에는 몹시 초라해 보이거나 기괴해 보일지라도 내 삶의 가치를 훼손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여기서 유일하게 중요한 철학적 핵심은, 그 기준이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 내 머릿속에 강제로 이식되거나 세뇌된 것이 아니라, 내 존재의 가장 깊고 어두운 심연에서부터 껍질을 깨고 발아하여 비바람을 맞으며 스스로 자라난 진짜 '나의 기준'이라는 숭고하고도 절대적인 사실 하나입니다. 나만의 단단한 잣대를 가슴에 품은 사람은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의 가벼운 칭찬에 입꼬리가 올라가며 우쭐대거나 교만해지지 않으며, 근거 없는 비난과 날 선 조롱에도 영혼의 상처를 입고 무력하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오직 스스로가 엄격하게 정해놓은 그 내밀한 기준에 자신이 오늘 도달했는지 못했는지의 치열한 여부만이, 자신의 삶을 측정하고 심판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평가 지표로 굳건하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기존 세계의 파괴와 새로운 자아의 창조라는 거대한 서사를 현실의 땅 위에서 최종적으로 완성하고 마침표를 찍는 것은, 결국 '능동적인 선택'이라는 지극히 외롭고도 무거운 실존적 행위입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수백 권의 위대한 철학 책을 탐독하고 방구석에서 천 번의 무릎을 치며 짜릿한 깨달음을 얻었다 한들, 비바람이 몰아치고 진흙탕 같은 현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행동으로 결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두뇌 안에서만 스쳐 지나가는 무기력한 몽상이나 비겁한 지적 유희에 불과합니다. 내가 피땀 흘려 세운 새로운 기준에 철저하게 입각하여, 아침에 눈을 떠서 하는 아주 사소한 일상의 루틴부터 거대한 인생의 진로를 180도 뒤바꾸는 중대한 기로에 서기까지, 남 탓이나 불우한 환경 탓을 하며 비겁하게 숨지 않고 그 모든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오롯이 어깨에 짊어지고 책임지는 근육을 매일같이 가혹하게 단련해야 합니다. 주체적인 선택의 결과가 설령 참혹한 실패와 뼈아픈 상실로 귀결될지라도, 그 상처투성이의 실패조차 타인의 명령에 맹종한 결과가 아닌 나의 주권적인 능동성이 직접 빚어낸 영광스럽고 눈부신 훈장으로 찬란하게 승화됩니다. 주인이 자비롭게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에 만족하는 노예는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달콤한 편안함을 대가로 얻지만, 황야를 걷는 자유인은 스스로 배고픔과 굶주림을 선택하더라도 기꺼이 삶의 모든 책임이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두 어깨에 당당히 견뎌냅니다. 우리는 남은 생애 동안 과연 어떤 삶의 궤적을 선택할 것입니까. 최진석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철학은 우리에게 안락하지만 수치스럽고 모멸적인 노예의 목줄을 과감히 끊어버리고, 뼛속까지 고독하고 춥지만 눈부시게 찬란한 자유인의 거친 황야로 당당하게 걸어 나올 것을 피를 토하듯 절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5. 완전히 다른 삶으로 이동하기
머릿속의 관념적인 인식 대전환은 구체적인 행동의 물리적이고 폭력적인 단절을 거쳐서만 비로소 현실의 피와 살을 입고 탄생합니다. 과거의 낡은 자아와의 미련 없는 처절한 결별과 야수 같은 결단력 있는 실천만이, 우리를 익숙한 영토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눈부신 삶으로 도약하게 만드는 유일한 마법이자 동력입니다.
모든 철학적 사유의 거대한 끝, '결단'. 이 두 글자는 최진석 교수가 이끌어온 기나긴 지적 여정의 대미를 장식하는 가장 장엄하고도 엄숙하며, 동시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품은 화두입니다. 우리는 머리로는 천 번 만 번 낡고 썩은 것들을 내다 버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되뇌며, 가슴으로는 새로운 주체적인 삶을 향해 당장이라도 나아가야 한다고 뜨겁게 다짐하면서도, 정작 현실의 팍팍한 삶에서는 익숙한 안온함이 던져주는 마약 같은 달콤한 유혹과 쥐꼬리만 한 기득권을 끝끝내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연약하고 모순적인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본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꿈꾸는 진정한 존재의 비약적인 도약은, 머릿속의 낭만적이고 온건한 다짐이나 타인 앞에서의 화려한 수사학적 선언 따위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과거의 나를 안전하게, 그러나 꼼짝달싹 못 하게 붙들어 매고 있던 그 굵고 질긴 쇠사슬을, 단칼에, 그리고 일말의 주저함 없이 단호하게 끊어내는 피투성이의 현실적 결단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일상을 뒤엎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강을 무사히 건넌 후 자신이 타고 온 배를 주저 없이 불태워버려 뒤로 돌아갈 퇴로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죽기를 각오한 배수진을 치지 않는 한, 우리는 삶의 위기와 극한의 고통이 닥칠 때마다 어김없이 과거의 익숙하고 따뜻했던 요새로 비겁하게 꼬리를 말고 퇴각하고 말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결단이란 스스로와의 알량한 타협이나 변명의 여지를 단 1퍼센트도 남겨두지 않는 극단적이고 잔혹한 선전포고입니다. 과거의 나와 나를 둘러싼 낡은 세계관의 멱살을 잔뜩 틀어쥐고, 이제부터는 내가 스스로 세운 전혀 다른 문법과 룰에 따라 이 세상을 돌파하며 살아가겠다는 혁명의 붉은 신호탄을 어두운 우주를 향해 쏘아 올리는 장엄한 행위인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를 잿더미로 만들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길은, 단순히 기존의 것을 조금 다듬어 흠집을 개선하거나 점진적으로 나아지는 우상향의 발전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반복이 아닌 근본적 전환'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시프트를 강렬하게 요구합니다. 답답한 번데기의 껍질을 갈기갈기 찢고 고통스럽게 세상으로 나오는 눈부신 나비는, 과거 흉측했던 애벌레의 형태를 조금 예쁘게 화장하고 수정한 연장선상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애벌레 시절의 모든 정체성을 완전히 죽여 없애고, 하늘을 나는 '날개'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물리적 법칙과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적용받는 새로운 우주의 기적적인 탄생입니다. 우리 삶의 궤적과 영혼의 성장 역시 정확히 이와 같은 파괴적 전환의 극단적인 방식을 따라야만 합니다. 어제의 참담한 실패를 조금 땜질해서 오늘을 근근이 무마하며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내 삶을 지배했던 전제와 공식 자체를 밥상을 엎어버리듯 뒤엎어버리고, 아예 완전히 낯선 판 위에서 새로운 룰로 인생 게임의 주사위를 던져야 합니다. 이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벼랑 끝으로 스스로의 등을 떠밀어 몰아넣는 엄청난 존재의 용기와 원초적인 공포를 동반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껍질을 산산조각 내는 죽음과도 같은 극한의 고통 없이는 하늘을 자유롭게 비상하는 새의 탄생도 영원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안전지대라는 견고하고 안락한 알껍데기를 내부에서부터 자신의 뾰족한 부리로 피가 나도록 맹렬하게 쪼아 대는 그 치열하고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만, 진정으로 살아 숨 쉬고 펄떡이는 참된 주체의 생명력이 찬란하게 움트게 됩니다.
이 격렬하고 참혹한 자기 파괴와 전환의 용광로를 거쳐 마침내 우리가 숨을 몰아쉬며 도달하게 되는 궁극적인 경지가, 바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뼛속 깊이, 세포 하나하나에 체득한 절대적인 상태입니다. 내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거친 풍파를 잠재우고 내 주변의 모든 상황을 내 마음대로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전지전능함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폭력적인 비바람이 몰아치고 예기치 않은 비극의 거대한 파도가 내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듯 덮쳐오더라도, 내면의 고요하고 깊은 태풍의 눈을 잃지 않고 거칠게 요동치는 인생이라는 배의 조타수를 손에 피가 나도록 굳건히 붙잡고 견뎌내는 압도적인 내적 저항력과 영혼의 맷집을 획득함을 뜻합니다. 남들이 뭐라 비난하든 나 홀로 귀를 닫고 독불장군처럼 내 길만을 고집하겠다는 어린아이 같은 맹목적인 아집과도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나에게 처해진 한계 상황을 명료하고 차갑게 직시하면서도 뱀처럼 유연하게 대처하되, 그 모든 대처와 삶의 선택의 심연에 흐르는 거대한 동력이 결코 외부의 강요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나의 가장 깊은 내면적 결단과 주권적 책임감에서 기인하는 숭고하고 당당한 상태. 최진석 교수의 철학이 지독하게 빚어내고자 하는 궁극적인 인간상, 즉 이데올로기의 어두운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온전히 삶의 서늘한 실재와 정면으로 조우하는 참된 주권자의 눈부신 모습이 바로 이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험난하고 긴 사유의 여정에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영적 각성과 피 맺힌 결단의 과정이 단 한 번의 극적인 깨달음이나 일회성의 통쾌한 성취로 장식되고 덧없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내 심장이 멈추고 죽는 그 순간까지 평생을 두고 밭의 잡초를 매듯 가꾸고 투쟁해 나가야 할 '지속 가능한 변화'의 흔들리지 않는 동력으로 내 삶의 정중앙에 굳건히 뿌리내려야만 합니다. 마음속의 혁명은 하룻밤의 뜨거운 열기와 흥분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그 혁명의 성과를 차가운 현실의 일상 속에서 타협하지 않고 지켜내며 성숙시키는 일은 뼈를 깎는 지루하고도 지난한 인내를 끝없이 요구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나태함에 낯설고 불편한 질문의 비수를 서늘하게 던지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독버섯처럼 흉측하게 돋아나는 교만과 아집, 과거로 회귀하려는 관성의 싹을 매일 아침 미련 없이 잔혹하게 쳐내며,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롭게 부활하는 경이로운 삶의 태도를 결연하게 견지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결코 쉽거나 낭만적인 꽃길이 아닙니다. 등대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밤바다를 조각배 하나에 의지해 항해하듯 뼛속까지 고독하고, 수없이 넘어지며 무릎에서 피가 나는 지독히 피곤한 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하루, 아니 단 한 순간이라도 억압적인 타인의 가짜 껍데기를 찢어 벗어던지고 내 삶의 진짜 주인이 되어 그 눈부시고 시린 자유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터질 듯 들이마셔 본 사람은, 결코 과거의 그 좁고 어둡고 질식할 것 같았던 노예의 감방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 책을 덮으며 저는 이 철학적 해체 작업이 비단 개인의 처세나 심리적 위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통찰에 도달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공론장이 극단적인 혐오와 진영 논리로 찢겨 있는 근본적인 이유 역시, 우리 각자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거세당한 채 미디어가 던져주는 분노의 이데올로기에 '익숙하게' 편승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진정한 사회적 연대와 건강한 민주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우리 모두가 집단의 안온한 가치관을 철저히 버리고 고독한 단독자로 우뚝 서서 질문을 던질 때, 그 거친 황야 위에서 새롭게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책을 개인주의적 성찰을 넘어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뜨겁게 토론해야 할 절실한 이유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