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세상 속 성경의 서사 5부 (5/7) : 제2경전의 시대, 억압과 고난 속에서 잉태된 희망
제국적 억압과 고난의 시스템 내부에서 잉태된 희망의 구조를 조명하여, 부조리한 세상을 돌파하는 주체적 실존의 인식론적 무기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왕들의 이름표를 외우다 지쳐 슬그머니 책장을 덮어버린 적이 있으신가요? 끝없이 쏟아지는 전쟁과 배신의 연대기, 거기에 솔로몬 성전의 그 숨 막히게 치밀한 건축 도면까지 활자로 시뮬레이션하려다 보면 저의 뇌는 금세 과부하를 일으켰답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위대한 역사를 목격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첫 장을 열었지만, 결국 그 방대한 스케일이 뿜어내는 무자비한 '활자의 무게'에 짓눌려 넉다운되고 마는 것이었죠.
하지만 제가 그토록 버거워했던 이 거대한 기록들은, 사실 인간이 세운 국가와 제도의 질서가 어떻게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지를 증명하는 처절한 '실패의 영수증'이기도 했습니다. 모세오경을 통해 주어진 율법이라는 질서는 현실의 권력과 욕망 앞에서 끊임없이 도전을 받았고, 왕국의 몰락은 인간이 구축한 질서의 한계에 대한 깊은 회의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이전 단계에서 거시적 시스템의 붕괴 이후 홀로 남겨진 개인이라는 미시적 내면으로 시선을 이동하여, 인간이 쏟아내는 실존적 절망과 철학적 사유의 극한을 탐험했습니다.
인간의 언어와 감정이 허무라는 중력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는지, 그리고 인간의 이성만으로 부조리한 세계의 심연을 건널 수 있는지에 대한 뼈아픈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지혜문학이 보여 주는 인간의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개인의 내면적 성찰과 일상의 지혜만으로는 인간과 사회를 둘러싼 거대한 역사적 현실을 근본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자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서사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탐험할 영역은 바로 이 지점, 즉 인간이 스스로 구축한 질서의 한계를 넘어 역사의 외부와 새로운 가능성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기원전의 헬레니즘 세계가 펼쳐지면서 유다 공동체는 새로운 문화와 정치적 지배, 그리고 정체성의 위기와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셀레우코스 왕국의 지배와 종교적 박해는 마카베오기에서 공동체의 신앙과 정체성을 뒤흔드는 핵심적인 역사적 배경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서로 다른 시대적 맥락 속에서 탄생한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권, 마카베오기 하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고난 속에서 신앙과 지혜, 정체성과 희망의 문제를 탐구합니다. 이 일곱 권을 하나의 역사적 묶음으로 단순화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시대와 문학적 형식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하나의 질문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인간의 질서가 흔들리고 외부의 억압이 거세질 때, 공동체와 개인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새로운 희망을 구성할 수 있는가.
우리가 따라갈 것은 단순한 심판의 메시지나 윤리적 훈계가 아닙니다. 왜 부조리한 세상은 이토록 집요하게 인간의 정체성을 흔드는가, 파괴의 잿더미 속에서 무명의 영웅들과 지혜자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을 사유하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억압과 고난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단련된 희망은 어떻게 무너진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자력 구원의 환상이 산산조각 난 자리, 역사의 가장 외로운 단층선 위에서 비로소 선명하게 돋아나는 저항과 신앙, 그리고 초월적 사유의 궤적을 좇는 여정을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토빗기와 유딧기: 일상의 부조리를 해체하는 미시적 구원의 궤적
제2경전의 서막을 여는 토빗기와 유딧기는 거대 제국의 지배라는 거시적 폭력 아래 놓인 개별 주체들이, 부조리한 세상의 질서에 어떻게 저항하고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정교한 미시 서사입니다. 먼저 토빗기는 아시리아로 끌려간 유배지 니네베를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주인공 토빗은 억압과 고난 속에서도 신앙과 자선을 실천하며 죽은 동족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묻어주는 의로운 인물입니다. 그러나 텍스트는 그의 선행이 곧바로 보상으로 이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새의 배설물이 그의 눈에 떨어져 시력을 잃게 되는 극단적이고도 역설적인 고난을 안겨 줍니다. 같은 시간, 멀리 메디아의 엑바타나에서는 악귀 아스모대오스에게 일곱 남편을 차례로 잃고 모욕까지 당한 여인 사라의 절망이 교차합니다.
이 두 인물의 까닭 없는 고통은, 선을 행하면 곧바로 복을 받는다는 단순한 인과율만으로는 인간의 고난을 설명할 수 없음을 드러냅니다. 닫힌 체계의 논리로는 결코 설명하기 어려운 이 상황에서, 두 사람이 선택한 것은 체념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하느님께 다다르자 천사 라파엘이 파견됩니다. 라파엘의 개입은 바다를 가르거나 성벽을 무너뜨리는 거시적 기적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평범한 여행의 동반자로 토비야의 여정에 동행하는 섭리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물고기의 간과 심장, 그리고 쓸개라는 가장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도구를 매개로 악귀를 물리치고 시력을 회복하는 과정은, 토빗기의 구원이 추상적인 관념에 머물지 않고 결혼과 가족, 건강과 일상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토빗기의 서사는 거대한 제국의 폭력 앞에서도 인간이 신앙과 연민, 가족과 공동체를 향한 책임을 포기하지 않을 때, 파편화된 일상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의 구조를 따뜻하면서도 예리하게 보여줍니다.
반면 유딧기는 토빗기와 다른 방식으로 훨씬 더 직접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그려냅니다. 아시리아 군대의 대장군 홀로페르네스가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의 요충지 배툴리아를 포위하여 물을 확보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때, 성읍의 지도자들은 극심한 갈증과 공포 속에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놓입니다. 물리적 힘의 우위 앞에서 절망이 극대화된 이 순간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아름답고도 냉철한 과부 유딧입니다. 그는 남성 중심의 군사적 질서가 한계에 도달한 틈을 뚫고, 자신의 신앙과 지혜를 무기로 적장의 진영 안으로 들어갑니다.
유딧의 무기는 군사력만이 아니라, 적장의 오만과 욕망을 역이용하는 치밀한 언어와 심리적 전략이었습니다. 홀로페르네스의 천막에서 유딧은 그를 안심시키고, 그가 술에 취해 잠든 틈을 이용하여 그의 칼로 목을 두 번 내리쳐 잘라 냅니다. 이 극적인 참수 사건은 거대한 제국의 물리적 힘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신앙과 지혜를 가진 한 개인의 결단이 역사의 흐름을 뒤집을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유딧의 행동은 단순한 인간적 영웅주의로만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고, 승리한 뒤에는 전리품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따라서 유딧기의 구원은 인간의 주체적 행동과 하느님의 구원이 결합되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결국 토빗기와 유딧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난의 시대에 요구되는 실존의 양식을 제안합니다. 한쪽이 일상의 신앙과 가족의 회복,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섭리를 통한 치유의 궤적을 보여준다면, 다른 한쪽은 체제의 폭력 앞에서 한 개인이 지혜와 용기를 무기로 직접 행동하는 저항의 궤적을 보여줍니다. 두 텍스트는 억압받는 공동체에게 어떠한 형태의 부조리 앞에서도 인간이 수동적인 희생양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동시에 그 주체적 행동의 궁극적인 방향은 인간 자신을 절대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에 자신을 열어 두는 데 있습니다.
토빗기의 실명과 유딧기의 과부라는 두 모티프는 각각 고난과 사회적 취약성의 자리에 놓인 인물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특히 유딧기는 당시 사회에서 보호받아야 할 과부의 위치에 있던 한 여성을 거대한 제국의 군사적 폭력을 무너뜨리는 중심적 행위자로 등장시킵니다. 토빗기 역시 실명과 유배라는 이중의 고난 속에 놓인 한 개인의 삶을 통해, 거대한 역사적 폭력보다 일상의 신앙과 가족의 회복이 어떻게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두 텍스트는 강자의 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가장 취약해 보이는 존재가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제국적 질서의 절대성에 균열을 냅니다.
마카베오기 상권과 하권: 제국의 폭력에 맞선 피의 항전과 실존의 충돌
제2경전의 역사적 뼈대를 이루는 마카베오기 상권과 하권은 기원전 2세기 헬레니즘 시대, 특히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유다교의 종교적 관습을 억압하고 헬레니즘적 질서를 강요했던 격변과 그에 맞선 유다인들의 항전을 묘사합니다. 안티오코스의 통치 아래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이민족의 제사로 더럽혀지고, 할례와 안식일 등 유다교의 전통적 관습이 금지되었으며, 율법에 어긋나는 음식을 먹도록 강요하는 박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지배를 넘어 유다 공동체의 종교적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마카베오기 상권은 이러한 폭력에 맞서 모데인 마을의 사제 마타티아스와 그의 다섯 아들이 일으킨 무장 봉기를 비교적 역사적·연대기적인 방식으로 서술합니다. 마타티아스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저항 운동을 이끌며 여러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군대를 물리칩니다. 열세한 병력으로 적의 허를 찌르고 기습과 지형을 활용하는 전투가 반복되면서, 유다의 군사적 저항은 점차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합니다. 결국 성전을 탈환하고 정화하여 다시 봉헌한 사건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하누카, 곧 성전 봉헌 축제의 역사적 배경이 됩니다. 이후 이러한 항전은 시몬 마카베오 시대에 유다의 독립으로 이어졌고, 그의 후손들이 거의 한 세기 동안 통치하는 하스몬가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상권이 무장 저항과 정치적 독립의 과정을 중심으로 서술한다면, 마카베오기 하권은 같은 시대의 사건을 훨씬 더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시각에서 조명합니다. 하권은 상권의 단순한 연속이 아니라 별개의 저술로서, 특히 박해 속에서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신앙을 강조합니다. 율법학자 엘아자르의 죽음과 일곱 형제와 그 어머니의 순교는 하권 전체의 신학적 정점을 이룹니다.
이 순교의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을 견뎌 내는 영웅주의가 아닙니다. 박해자들이 육신을 훼손할 수는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과 부활에 대한 희망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는 믿음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특히 일곱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의 사지가 잘려 나가는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는 희망을 선언합니다. 마카베오기 하권은 이처럼 박해 속에서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앙을 매우 선명하게 표현합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성경 입문에서도 하권의 종말론이 영혼뿐 아니라 육신을 포함한 의인들의 부활을 가르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하권 12장에서는 전사자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바치는 장면을 통해, 산 이들의 기도와 제사가 죽은 이들에게도 효력을 지닐 수 있다는 신앙을 보여 줍니다. 이는 가톨릭교회의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연옥에 관한 신학적 이해와 연결되는 중요한 성서적 근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역시 이를 ‘중개 기도’라는 신학의 발전으로 설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마카베오기 상권과 하권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저항 양식을 보여줍니다. 상권에서는 칼과 창을 든 무장 저항을 통해 공동체의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독립을 지켜 내는 투쟁이 나타나고, 하권에서는 고문과 죽음 앞에서도 율법과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순교자의 저항이 중심에 놓입니다. 하나는 역사의 현장에서 제국의 힘에 맞서는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순간에도 정체성과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내면의 저항입니다.
이토록 치열한 항전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하나의 실존적 질문을 던집니다. 현대 사회의 억압은 더 이상 칼과 창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거대 자본과 미디어, 그리고 동질화를 촉진하는 디지털 시스템 역시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와 정체성에 강한 압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마카베오기 자체가 현대 사회를 예언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텍스트의 문제의식을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읽어 보는 하나의 해석입니다.
그 관점에서 마카베오기의 이야기는 묻습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무엇을 타협하고 있으며,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정체성을 잃어버린 생존은 과연 온전한 생존인가. 마카베오기 상·하권은 피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역사적 현실 속에서도, 인간이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가치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때 절망 너머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음을 강렬하게 증언합니다.
지혜서: 헬레니즘의 파도 속에서 재구성된 철학적 영토
구약 성경의 저술 전통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시기에, 헬레니즘 세계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였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형성된 지혜서는 유다교의 전통적 신앙과 헬레니즘 문화가 긴장과 상호작용을 이루던 지적 환경 속에서 탄생한 독특한 지혜 문학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입문에 따르면, 지혜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다교 문헌들과 관련된 작품으로, 무명의 저자가 그리스 말로 저술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작 시기는 정확히 확정되지는 않지만 기원전 50년경을 상한으로 하여 기원전 30년 이후의 로마 시대까지 내려갈 가능성도 제시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전통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헬레니즘 세계의 언어와 지적 환경 속에서 유다교의 신앙과 지혜를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과제와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지혜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교의 전통을 그리스어라는 새로운 언어와 헬레니즘적 사유의 지평 안에서 재구성한 작품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지혜서 전반부는 악인들의 입을 빌려 인간의 삶을 철저히 현세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사고를 묘사합니다. “우리의 삶은 짧고 슬프다”는 그들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죽음 뒤에는 돌아올 길이 없으니 현재의 좋은 것들을 즐기자는 논리가 이어집니다. 그들은 가난한 의인을 억압하고 “우리 힘이 의로움의 척도가 되게 하자”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사고를 특정 철학 학파의 사상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지만, 지혜서의 악인들이 보여 주는 현세적 쾌락주의와 힘의 논리는 헬레니즘 시대의 다양한 세속적 사고와 대비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혜서가 이들의 사유를 단순한 철학적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시야를 현세에만 가두는 영적·인식론적 한계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저자는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고 선언합니다.
이에 맞서 지혜서가 제시하는 핵심적인 통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의인의 불사불멸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입니다. 지혜서 2장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선언하고, 3장은 의인의 영혼이 하느님의 손안에 있으며 죽음 이후에도 평화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의인의 죽음이 파멸처럼 보일지라도, 지혜서의 관점에서 그것은 최종적인 패배가 아닙니다. 의인은 하느님 안에서 불사의 희망을 지니며, 고난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과정 속에서 새롭게 해석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혜서는 욥기가 끈질기게 제기했던 까닭 없는 고통의 문제와 코헬렛이 마주했던 삶의 허무를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봅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현실만으로 선과 악의 최종적인 결말을 판단할 수 없으며,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의 짧은 생애를 넘어서는 차원에서 완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서의 이러한 사상은 유다교 지혜 전통 안에서 죽음과 정의의 문제를 새롭게 해석하는 중요한 발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지혜서는 지혜 자체를 단순한 처세의 기술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거룩한 능력으로 묘사합니다. 특히 6─10장에서는 지혜가 인간에게 덕과 예지를 가르칠 뿐 아니라 창조와 섭리에 깊이 관여하는 존재로 표현됩니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는 표현은 지혜를 우주적 질서와 연결합니다.
이때 지혜서는 솔로몬을 화자로 내세우는 문학적 장치를 사용합니다. 솔로몬은 유다교 전통에서 지혜로운 임금의 대표적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입을 통해 지혜를 찬미함으로써 전통에 권위를 부여하면서도 새로운 사상을 제시합니다. 이는 헬레니즘 세계의 지적 언어와 유다교의 신앙 전통이 반드시 서로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문학적 전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지혜서는 이집트 탈출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합니다. 자연과 피조물은 그 자체로 선악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의인에게는 구원의 도구가 되고 악인에게는 심판의 수단이 됩니다. 또한 13장 이후에는 자연 숭배와 우상 숭배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힘에 매혹되어 그것을 만든 창조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의 인식론적 오류를 비판합니다.
결국 지혜서는 헬레니즘 세계의 언어와 지적 환경 속에서도 유다교의 신앙과 지혜가 결코 낡은 전통으로 머물러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지적 응답입니다. 그것은 그리스 철학을 단순히 적대하거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환경 속에서 유다교의 신앙을 지혜와 이성, 정의와 불멸의 희망이라는 보편적 언어로 다시 표현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혜서는 부조리한 세상을 단순히 견디는 책이 아닙니다. 눈앞의 현실만으로 인간의 운명을 판단하지 않고, 죽음과 고난 너머의 차원까지 사유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책입니다. 헬레니즘이라는 거대한 지적 파도 속에서도 자신의 전통을 잃지 않고 새로운 언어로 다시 사유했던 이 알렉산드리아의 지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의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는 거대한 시대의 지적 압력 앞에서 무엇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무엇을 새롭게 해석하며, 무엇을 끝까지 지켜낼 것인가.
지혜서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고대 유다교의 깊은 사유적 응답입니다.
지혜서가 헬레니즘 세계의 언어와 사유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단순한 문화적 동화라기보다, 유다교의 신앙과 지혜 전통을 새로운 지적 환경 속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저는 이것을 '문화적 해킹(Cultural Hacking)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즉, 외부에서 유입된 언어와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활용하여 자신의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하고 방어하는 것입니다.
지혜서는 그리스어라는 헬레니즘 세계의 보편적 언어를 통해 지혜와 정의, 불멸, 섭리라는 유다교의 핵심 주제를 새롭게 펼쳐냅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앙과 이성이 반드시 대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전통적 신앙 역시 새로운 지적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사유되고 재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서는 신앙이 지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성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고대의 지적 실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집회서: 붕괴된 전통의 복원과 일상의 카오스를 제어하는 실천적 규범
지혜서가 헬레니즘 세계의 지적 환경 속에서 유다교의 지혜 전통을 새로운 언어로 재구성했다면, 예루살렘의 학자 예수 벤 시라가 기록한 집회서(Sirach/Ecclesiasticus)는 헬레니즘의 영향 속에서 흔들리던 율법과 전통을 일상의 윤리와 지혜로 다시 결합하려 했던 방대한 실천적 사유의 집대성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유다 사회에는 그리스식 교육과 체육관을 비롯한 헬레니즘 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있었으며, 유다교 전통을 어떻게 지켜 내면서 새로운 문화적 환경과 공존할 것인가는 중요한 지적 과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벤 시라는 학교를 열고 젊은이들을 가르치면서,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지혜와 율법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하나의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집회서의 핵심 명제는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지혜의 근원은 가장 높으신 분의 말씀”이라는 선언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집회서에서 지혜는 단순한 세속적 처세술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 질서이며, 지혜의 출발점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특히 24장에서는 의인화된 지혜가 이스라엘의 율법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벤 시라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지혜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과 결합함으로써, 지혜를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에 머물게 하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규범으로 끌어내립니다. 전통은 죽은 화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대응하면서도 계속 살아 움직이는 지혜의 우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벤 시라가 헬레니즘의 모든 요소를 무조건 거부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새로운 문화권에서 유입되는 사상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유다교의 본질적인 규범과 충돌하는 요소에 대해서는 분명한 경계선을 긋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폐쇄적 보수주의라기보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구별하려는 지적 전략으로 볼 수 있습니다. 헬레니즘의 언어와 사유를 완전히 차단하는 대신, 자신의 전통을 그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다시 설명하고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굳건한 신학적 토대 위에서 집회서는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는 세밀하고 실용적인 격언들을 펼쳐냅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 재물의 올바른 사용과 자선, 진실한 우정을 구별하는 법, 연회에서의 예절과 절제, 말과 침묵의 지혜,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태도, 의사와 약초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삶의 구체적인 장면들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집회서 38장은 의사를 존중하고 약초와 치료의 수단을 활용하는 것 역시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일상의 아주 작은 영역까지 파고드는 집회서의 윤리를 현대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일종의 ‘마이크로 매니지먼트(Micro-management)’에 가까운 생활 윤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집회서 자체의 표현이 아니라 현대적 해석입니다. 중요한 것은 벤 시라에게 신앙이 추상적인 교리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말 한마디, 돈을 사용하는 방식,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 부모를 대하는 태도, 연회에서의 행동과 같은 사소해 보이는 행위 하나하나가 인간의 품격과 공동체의 질서를 구성합니다. 무너진 세계를 재건하는 첫걸음은 거대한 혁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의 관계와 행동을 올바르게 복원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특히 여성과 종에 관한 일부 구절은 오늘날의 독자에게 분명한 불편함과 긴장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대목은 고대 지중해 사회의 성별과 신분 질서를 반영하며, 현대의 평등과 인권이라는 관점에서는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단순히 벤 시라 개인의 악의나 의도로 환원하기보다는, 그가 살아간 사회의 역사적·문화적 한계와 당시의 사회적 질서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한계는 헬레니즘의 문화적 변화 속에서도 기존의 공동체 질서와 전통을 보존하려 했던 벤 시라의 보수적 성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전통을 지키려는 힘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방패가 될 수 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그 전통 안에 포함된 위계와 한계 역시 함께 성찰되어야 한다는 긴장을 남깁니다.
집회서 후반부를 장식하는 ‘조상들에 대한 찬양’은 이 책의 백미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을 시작으로 모세, 여호수아, 다윗, 엘리야 등 이스라엘 역사 속 위대한 인물들을 차례로 소환하고, 마지막에는 당시의 대사제 시몬까지 찬양합니다. 이 거대한 역사적 파노라마는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닙니다.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적 압력 속에서 살아가는 유다인들에게, 자신들은 아무런 역사도 없는 주변부의 민족이 아니라 수많은 세대를 거쳐 이어진 신앙과 지혜의 전통을 상속받은 공동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집회서에서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정체성을 보존하는 하나의 실천입니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낯선 문화적 환경 속에 놓여 있더라도, 과거의 조상들과 그들의 지혜를 기억하는 행위는 공동체가 누구인지 다시 확인하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를 살아갈 기준과 방향을 회복하는 행위가 됩니다. 기억을 복원하는 일이야말로 정체성을 흔드는 시대에 공동체가 스스로를 다시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입니다.
결국 집회서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에 포함된 제2경전 가운데서도 일상과 신앙, 이성과 율법, 전통과 현재의 실천을 촘촘하게 직조해 낸 거대한 지혜의 태피스트리입니다. 벤 시라는 헬레니즘이라는 거대한 문화적 파도 앞에서 전통을 무조건 폐쇄적으로 방어한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것과 거부할 것을 구별하면서 이스라엘의 지혜와 율법을 새로운 시대의 언어로 다시 정립하려 했습니다. 그의 텍스트에서 율법은 박물관 속에 보존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인간의 말과 행동, 재물과 우정, 가족과 공동체를 끊임없이 조율하는 살아 있는 질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집회서는 오늘날에도 하나의 실존적 질문을 던집니다. 거대한 시대적 변화와 문화적 압력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비판하며, 무엇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가. 그리고 그 가치들은 실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행동으로 구현되고 있는가.
집회서가 남기는 답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삶의 작은 관계와 행동을 바로 세우고, 지혜를 통해 욕망을 절제하며, 전통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거대한 세계의 혼돈을 단숨에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삶이라는 가장 작은 시스템부터 질서를 회복하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벤 시라의 실천적 지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질문으로 남습니다.
바룩서와 예레미야의 편지: 유배의 절망을 해체하는 예언적 변증
제2경전의 마지막 지층을 형성하는 바룩서는, 예레미야의 서기관이자 동료였던 바룩의 이름을 내세워 바빌론 유배를 배경으로 공동체가 겪어야 했던 신학적 고뇌와 회개의 여정을 그려낸 복합적인 문헌입니다. 현재의 바룩서는 동일한 저자와 시대에 속한다고 보기 어려운 서로 다른 네 부분이 결합된 작품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역사적 바룩이 이 책 전체를 직접 저술했다고 보기보다는, 그의 이름과 예레미야 전승을 권위의 기반으로 삼아 후대의 공동체가 자신의 현실을 해석한 문헌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본문은 바룩이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5년째 되던 해에 이 글을 기록한 것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배지라는 설정과 실제 저작 시기·장소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룩서가 바빌론 유배라는 역사적 재난을 배경으로 공동체의 죄와 회개, 지혜와 구원이라는 문제를 새롭게 성찰한다는 점입니다.
바룩서는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이 불타버린 파국의 원인을 외부 제국의 폭력에만 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동체 스스로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고백하며 시작합니다. “우리가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분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은 재난의 원인을 자기 공동체 내부에서 성찰하는 바룩서의 핵심적인 신학적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는 부조리한 고난 앞에서 타자를 원망하는 데 머물지 않고, 공동체 스스로 자신의 역사와 행동을 돌아보는 자기 성찰적 회개의 과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현대적인 해석의 언어이지만, 바룩서의 회개 기도가 보여주는 핵심적인 방향과 맞닿아 있습니다. 외부의 폭력이 아무리 거대하더라도, 공동체는 먼저 자신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돌아봅니다.
이러한 눈물겨운 참회의 기도 뒤에는 놀랍게도 지혜를 찬양하는 아름답고도 장엄한 시가 이어집니다. 바룩서의 시인은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서 쇠약해지고 고난을 겪게 된 현실을 지혜의 상실이라는 차원에서도 해석합니다. 인간의 힘과 지식만으로는 참된 지혜에 도달할 수 없으며, 지혜가 숨겨진 곳을 아는 이는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마침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의 책과 연결됩니다.
이 지점에서 바룩서는 집회서와 강하게 만납니다. 집회서가 지혜와 율법을 긴밀하게 결합했다면, 바룩서는 유배와 상실의 현실 속에서 율법 안에 담긴 지혜를 다시 발견하도록 공동체를 이끕니다. 여기에서 율법은 단순한 법률 조항의 집합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하느님의 지혜로 제시됩니다. 유배라는 극단적인 상실 속에서 공동체가 붙잡아야 할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힘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와 그 지혜가 구현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바룩서의 4장과 5장으로 넘어가면 텍스트는 의인화된 예루살렘이 흩어진 자녀들을 향해 부르는 처절한 애가와, 그 슬픔을 위로하며 다가올 귀환의 영광을 선포하는 예언적 위로로 전환됩니다. 예루살렘은 슬픔과 고난의 옷을 벗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을 입으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이 장면에서 예루살렘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흩어진 자녀를 기다리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그려집니다.
특히 산을 낮추고 골짜기를 메워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돌아올 길을 마련하고, 하느님의 영광이 그들을 이끌 것이라는 묘사는 이사야서의 귀환과 회복의 이미지와 깊은 울림을 공유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현재의 물리적 폐허가 역사의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라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유배의 현실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영원히 끝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폐허 이후에도 새로운 귀환의 길을 열어 놓습니다.
한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에서는 라틴 성경 전통에 따라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룩서의 마지막 장인 제6장에 배치합니다. 칠십인역에서는 바룩서와 별도로 배치되지만, 현재의 가톨릭 성경에서는 바룩서와 연결되어 읽힙니다.
‘예레미야의 편지’는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포로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를 집요하게 비판합니다. 금과 은과 나무로 장식된 우상들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말을 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며, 녹슬고 좀먹는 것을 스스로 막지도 못합니다. 새와 동물에게조차 무력한 이 우상들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묘사하면서, 인간이 두려워하는 거대한 신상들이 실제로는 아무런 힘도 없는 물질적 대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그것들은 신이 아니니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메시지는 단순한 우상 비판을 넘어섭니다. 거대한 제국의 화려한 궁정과 신전, 금과 은으로 장식된 신상, 그리고 그것을 떠받드는 거대한 정치적 권력 앞에서 피지배 민족이 느끼는 심리적 위축을 깨뜨리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대함이 곧 진리와 능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예레미야의 편지는 물질적 스펙터클에 가려진 권력의 허구를 폭로하는 강렬한 풍자적 저항으로 기능합니다.
이처럼 바룩서와 예레미야의 편지는 억압과 고난 속에서 잉태되는 희망이 단순한 낙관론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 희망은 먼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회개에서 출발합니다. 이어서 인간의 힘으로는 소유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를 율법 안에서 다시 발견하고, 마침내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우상과 권력의 외형적 위세를 상대화합니다. 회개와 지혜, 기억과 귀환, 우상 비판과 희망이 하나의 서사적 흐름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룩서는 시스템 밖으로 밀려난 자가 오히려 기존 질서의 한계를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실존적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공동체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께 돌아서며, 하느님의 지혜와 구원을 기다리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질서를 형성해 간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이 일곱 권의 제2경전을 관통하며, 부조리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에 짓눌린 고대 유다인들이 결코 수동적인 희생자로만 머물지 않았음을 목격합니다. 토빗과 유딧은 일상의 신앙과 공동체의 위기 속에서 행동했고, 마카베오 형제들과 순교자들은 율법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으며, 지혜서와 집회서는 헬레니즘 세계의 지적 압력 속에서 전통을 새로운 언어로 사유했습니다. 그리고 바룩서는 죄와 유배의 기억을 회개와 지혜, 귀환과 희망의 언어로 다시 구성했습니다.
이 모든 텍스트를 하나로 묶어 읽는다면, 우리는 억압이 극심해질수록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과 신앙, 공동체의 기억을 어떻게 다시 구성하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적인 역사 속에서도 회개하고 기억하고 사유하며,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가운데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만들어 낸 공동체의 증언입니다.
결국 제2경전의 일곱 권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학적 형식 속에서도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을 공유합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지키며, 어디에서 다시 희망을 시작할 것인가.
바룩서가 남기는 대답은 회개와 지혜, 기억과 귀환입니다. 폐허 속에서도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잃어버린 지혜를 다시 찾으며, 하느님께서 열어 주실 귀환의 길을 기다리는 것. 바로 그 과정 속에서 절망은 더 이상 역사의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향한 전환점이 됩니다.
나만의 사유 한 스푼
제2경전의 무겁고도 치열한 텍스트들을 활자로 짚어 내려갈 때마다, 제 안에서는 깊은 실존적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개신교의 정경 목록에서는 정경으로 인정되지 않는 이 제2경전이 품고 있는 역설적인 생명력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시대와 배경에서 형성된 이 책들을 하나의 역사적 묶음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지만, 그 안에는 헬레니즘 세계의 정치적·문화적 압력 속에서 자신의 신앙과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인간들의 치열한 몸부림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그 모습은 오늘날 디지털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알고리즘과 획일화된 성공의 기준 속에서 부유하며 고통받는 현대인의 초상과 묘하게 겹쳐집니다. 우리는 고대인들처럼 칼과 박해를 마주하지는 않지만, 매 순간 무형의 문화적 압력과 끊임없는 비교의 감옥 속에서 자신의 내면적 영토를 조금씩 빼앗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텍스트들은 제게 매우 서늘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세상의 압도적인 부조리 앞에서 나는 시스템에 순응하며 헬레니즘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자인가, 아니면 유딧처럼 두려움 속에서도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 허상을 베어낼 결단을 내리는 자인가. 지혜서가 보여 주듯, 눈앞의 물질과 권력만을 현실의 전부로 받아들이는 세계관은 인간을 허무의 구덩이로 밀어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2경전이 보여 주는 희망은 단순히 외부의 구원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태도에도, 인간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기구원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무너진 일상의 폐허 위에서 벤 시라처럼 다시 삶의 질서를 정돈하고,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 지혜와 생명의 가치를 향해 사유의 촉수를 뻗어 올리는 것. 그리고 바룩처럼 자신의 실패를 직시하고 회개하면서도, 하느님의 구원과 귀환을 기다리며 오늘의 삶을 다시 살아내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능동적인 응답과 초월적인 희망은 서로 맞물립니다. 바룩서의 회개와 희망, 집회서가 말하는 시련 속의 인내는 인간에게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명령하기보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결국 제2경전이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의 맥락에서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위대한 유산 가운데 하나는 제가 감히 ‘버티어냄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리 혹독한 겨울의 억압 속에서도, 영혼 깊은 곳에 율법과 지혜라는 보이지 않는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인간은 절망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지 않을 수 있다는 위대한 증언입니다.
유배지의 잿더미에 앉아 바룩의 애가를 부르는 오늘이라 할지라도, 거짓된 우상의 허구를 분별하고 자신의 삶을 다시 정돈하며, 아직 오지 않은 귀환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폐허 속에서도 미래를 향한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제2경전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제가 발견한 것은 인간의 완전한 자기구원이 아니라, 무너진 인간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인간의 응답과 하느님의 희망이 서로 만나는 하나의 생명의 궤도였습니다.
거대 제국의 압력과 지독한 문화적 소외 속에서도, 기어코 자신들의 신앙과 정체성을 지키며 저항과 지혜, 순교와 희망의 언어를 직조해 낸 제2경전의 숨 막히는 여정을 끝까지 함께 통과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가장 어두운 밤에 가장 찬란한 지혜의 별이 뜨듯, 이 고대 텍스트들이 뿜어내는 맹렬한 생명력이 현대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불안과 고난을 돌파하는 예리한 이성의 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여섯 번째 서사의 지층에서는 마침내 그동안 축적되어 온 기다림과 희망이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됩니다. 초월적인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역사와 실존 안으로 직접 들어오는 사건, 곧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의 신비를 마주하는 경이로운 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부조리의 폭풍 속에서도 결코 내면의 빛을 잃지 않는, 단단하고 평온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