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yche & Systems[정신 역동과 체계]/Psychoanalysis & Trauma

똑똑한 사람들이 맹목적 믿음에 갇히는 진짜 이유,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소음 소믈리에 2026. 8. 28.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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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철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종교적 세뇌와 맹신이 작동하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심층 분석하며, 환상과 실재의 교차점에서 인간 내면의 구조적 얽힘을 해부합니다.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우리는 왜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가? 사이비 종교의 맹목성 뒤에 숨겨진 인간 무의식의 거대한 구조망을 슬라보예 지젝의 숭고한 대상 개념을 통해 해체하고,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믿음의 진짜 얼굴을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안녕하세요! 일상에서 혹은 뉴스를 통해 사이비 집단이나 맹신에 빠진 사람들을 볼 때면 자연스럽게 '도대체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교리를 믿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시는 분들 많으시죠? 저도 솔직히 말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맹목적 집단들의 행태를 접할 때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인이 어떻게 저토록 철저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세뇌당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종교 심리학이나 사회학 관련 자료들을 꼭 찾아보곤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제 사유의 지평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진짜 대박 통찰을 발견했어요! 그 난해하기로 소문난 슬라보예 지젝의 명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이 제시하는 철학적 해부학이 드디어 제 머릿속에 완벽하게 상륙했다는 거 있죠? 그것도 바로 종교적 맹신과 이데올로기(理念)의 완벽한 교집합을 통해서 말이에요. 정말이지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는 내내 기존의 세계관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충격이라 믿기지 않더라고요.

우리는 보통 ‘세뇌’라고 하면, 외부의 악의적인 교주, 즉 대타자의 대체물이 연약한 개인의 머릿속에 거짓된 정보를 강제로 주입하는 단선적인 폭력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지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무지몽매한 희생자와 간악한 가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 주체(主體) 스스로가 어떻게 기만적인 환상(幻想)의 구조를 적극적으로 지탱하고, 심지어 그 안에서 기묘한 향락(享樂)을 누리는지 파헤칩니다. 이제 굳이 멀리 비행기를 타고 낯선 컬트 집단의 심장부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 한복판에서도 작동하고 있는 ‘믿음의 알고리즘’을 들여다보며, 그 구조가 어떻게 우리의 욕망과 행동을 조직하는지 직접 경험하고 해부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깊이 파고들 만한 지적 탐험입니다.

이 독서 노트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무의식적 환상의 구조망을 해체하고, 주체의 심연에 자리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직시함으로써, 맹목적인 상징계의 굴레에서 벗어나 실재와 대면할 수 있는 자유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의 묵직한 개념들을 ‘종교적 세뇌’라는 구체적인 현상과 연결해 살펴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믿고 왜 믿으며, 때로는 그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끝까지 따라오신다면, 익숙했던 현실을 바라보는 해상도가 한층 달라질 것입니다.

 

증상의 발명과 무의식의 형태학 

가장 먼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카를 마르크스가 어떻게 증상(症狀)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냈는가 하는 점입니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주의(Commodity Fetishism) 분석과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병치시키며 텍스트의 포문을 엽니다. 종교적 세뇌를 분석할 때 우리는 흔히 그들이 믿는 교리의 내용, 즉 텍스트의 표면적 의미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에만 집착합니다. 외계인이 구원을 하러 온다거나, 특정 인간이 영생을 누린다는 식의 서사 말이죠. 하지만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형식의 분석(The Analysis of Form)을 통해 밝혀낸 혁명적 진실은, 진짜 비밀은 내용 뒤에 숨겨진 무언가가 아니라 형식 그 자체의 비밀에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맹목성은 신도들이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믿음의 형식이 어떻게 그들의 현실을 구조화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상품 형식의 무의식(The Unconscious of the Commodity Form)은 교환 가치가 마치 사물 자체의 초자연적인 속성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를 종교적 맥락으로 치환해 볼까요? 종교적 숭배 대상, 즉 영적 지도자나 성물은 그 자체로 신성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도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와 집단적 믿음이 그 대상을 신성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대상 자체가 본래부터 신성한 아우라를 뿜어낸다고 착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증상(Social Symptom)입니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현실을 가리는 색안경이나 허위의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의해 지탱되고 있습니다.

현대의 맹신을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탁월한 지점은 냉소주의(Cynicism as a Form of Ideology)에 대한 분석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순진하게 교리를 100%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속으로는 교주의 비리나 교리의 모순을 의심하면서도, 겉으로는 완벽한 신도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은 "나는 그것이 거짓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동한다"라는 기이한 분열 상태를 유지합니다. 이는 믿음이 개인의 내면적 심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례와 실천, 즉 물질적 기구 속에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이데올로기적 환상(Ideological Fantasy)은 우리가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행하느냐의 차원에서 작동합니다. 종교적 세뇌는 머릿속의 생각을 바꾸는 작업이라기보다, 신체가 참여하는 상징적 의례를 통해 믿음의 객관성(The Objectivity of Belief)을 확보하는 과정입니다. 기도를 하고, 헌금을 내고, 율법을 따르는 행위 자체가 무의식을 주조합니다.

"법은 법이다(The Law is the Law)"라는 명제는 카프카가 알튀세르를 비판하는 대목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종교적 계율은 그것이 내포한 지혜나 합리성 때문에 복종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맹목적 권위 그 자체, 아무런 내용 없는 텅 빈 기표로서의 법이기 때문에 맹신을 유발합니다. 현실을 지지하는 환상(Fantasy as Support of Reality)은 잉여 가치(Surplus-Value)와 잉여 향락(Surplus-Enjoyment)의 궤적을 잇습니다. 맹신에 빠진 주체는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헌신 속에서 고통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억압적 구조에 복종함으로써 은밀하고도 강력한 잉여 향락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교주를 향한 광적인 환호성은 전체주의적 웃음(Totalitarian Laughter)의 기괴한 변주곡이며, 이 웃음은 진리를 향한 갈망이 아니라 이성적 주체됨을 포기한 자들의 안도감에서 비롯됩니다.

사유 한 스푼
결국 종교적 세뇌란, 인간 내면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외부의 거대한 환상 구조를 빌려와 자신의 현실을 직조하는 처절한 생존 본능의 왜곡된 발현이 아닐까요? 우리는 환상 없이는 단 하루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연약한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증상에서 신트홈(Sinthome)으로의 역설적 도약 

세뇌의 맹목성을 해부하는 두 번째 단계는 증상의 변증법(The Dialectic of the Symptom)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증상은 단순히 치료하고 제거해야 할 질병이 아니라, 억압된 진실이 귀환하는 암호화된 메시지입니다. 신도들이 맹신 집단에 빠져드는 과정은 그들 삶의 근원적 균열과 결핍이 종교라는 증상의 형태를 빌려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증상이 상징화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실재(實在)로서의 증상(The Symptom as Real)으로 진화할 때 발생합니다.

역사 속의 반복(Repetition in History)을 논하며 헤겔을 소환하는 대목은 전율을 일으킵니다. 한 번의 비극으로 끝날 수 있었던 사건이 희극으로 반복되듯, 개인이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가 탈퇴한 후 또 다른 맹신적 집단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탁하는 반복적인 패턴은 그들이 여전히 근본적인 무의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증상으로서의 타이타닉(The Titanic as Symptom) 비유는 맹신의 붕괴를 설명하는 데 탁월합니다. 무적이라 믿었던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배가 빙산(실재의 파편)에 부딪혀 침몰할 때, 사람들은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침몰하는 배의 잔해에 더욱 맹목적으로 매달립니다.

여기서 라캉의 후기 개념인 신트홈(From Symptom to Sinthome)이 등장합니다. 증상이 해석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 상징적 메시지라면, 신트홈은 어떤 의미도 없지만 주체의 존재 자체를 묶어주는 절대적인 매듭입니다. 종교적 세뇌가 극단에 치달으면, 그 믿음은 더 이상 교리의 논리적 정합성이나 신적 약속의 성취 여부로 지탱되지 않습니다. 믿음 그 자체가 신트홈이 되어버립니다. 교주의 거짓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종말론적 예언이 빗나가도 신도들이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믿음을 버리는 순간 자신을 구성하던 심리적 우주 전체가 붕괴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데올로기적 향락(Ideological Jouissance)에 깊이 중독되어 있습니다. 이 향락은 고통과 쾌락이 기괴하게 뒤섞인 형태입니다. 맹목적인 복종, 재산의 헌납, 자아의 파괴 과정에서 겪는 고통은 오히려 대타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는 숭고한 도덕적 만족감으로 치환됩니다. 이데올로기의 그물망 속에서 신도들은 스스로를 학대하는 동시에 그 학대를 즐기는 도착적 구조에 갇히게 되며, 외부의 논리적 설득이나 객관적 증거는 이 강고한 신트홈의 벽을 결코 뚫을 수 없습니다. 의미가 소진된 자리에서 오직 향락만이 남아 주체를 지배하는 무서운 풍경입니다.

전통적 관점의 세뇌 지젝-라캉적 관점의 세뇌
외부의 강압에 의한 잘못된 신념의 주입 주체 스스로가 선택하고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
사실관계를 알게 되면 믿음이 붕괴됨 (지식의 부족) 알면서도 행하는 냉소적 이성. 사실을 아는 것은 신트홈을 파괴하지 못함
세뇌는 주체에게 오직 고통과 착취만을 남김 착취의 구조 속에서 기이한 이데올로기적 향락을 생산하고 누림

 

타자 속의 결여와 셰 부오이(Che Vuoi?) 

세 번째 논의는 자아 정체성(Identity)과 상징계의 관계를 파고듭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파편화된 기표들의 바다에서 특정한 교리와 집단에 고정되는 것일까요? 지젝은 이를 이데올로기적 누빔점(Ideological Quilting Point, point de capiton)으로 설명합니다. 일상에서 떠도는 불안, 불만, 삶의 무의미함이라는 부유하는 기표들은 종교적 서사를 만나는 순간 구원, 원죄, 종말이라는 특정 의미로 꿰매어집니다. 교주나 절대자의 이름은 사물과 단어를 고정시키는 닻의 역할을 합니다. 기술주의론(Descriptivism)과 반기술주의론(Anti-descriptivism)의 철학적 논쟁을 가로지르며, 지젝은 절대적 대상이 특정 속성들의 집합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속성들을 초과하여 대상을 그 대상으로 성립시키는 고정된 지시의 지점, 즉 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와 대상 a(objet a)의 논리로 기능한다고 논증합니다. 따라서 교주가 훌륭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 아니라, 그가 누빔점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의 모든 기행조차 신성한 신비로 이데올로기적 아나모르포시스(Ideological Anamorphosis)를 통해 신성한 신비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동일시(Identification)의 과정은 사후성, 즉 의미의 사후적 지연(Retroactivity of Meaning)을 통해 완성됩니다. 신도는 과거의 무의미했던 자신의 모든 고난과 상처를 종교적 서사 안에서 재해석합니다. "아, 내가 그토록 고통받았던 것은 이 구원의 섭리를 깨닫기 위한 신의 안배였구나!" 이렇게 의미는 항상 사건 이후에 소급하여 구성되며, 이 과정에서 주체는 교리가 제공하는 이미지와 시선(Image and Gaze)에 자신을 완벽하게 일치시킵니다.

이 지점에서 가장 소름 돋는 라캉의 질문이 등장합니다. 바로 "셰 부오이(Che vuoi? -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입니다. 신앙심 깊은 주체는 신(대타자)에게 기도를 올리지만,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진짜 질문은 "대타자인 당신은 내게서 무엇을 원하십니까?"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며, 오직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뿐입니다. 종교적 세뇌는 바로 이 욕망의 빈자리를 파고듭니다. 교단은 주체에게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라는 명확한 환상을 스크린(Fantasy as a Screen for the Desire of the Other)처럼 띄워줍니다. 맹신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대타자의 변덕스럽고 파악 불가능한 욕망 앞에서 느끼는 끔찍한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한 필사적인 방어 기제입니다.

그러나 지젝이 폭로하는 진실은, 향락의 대타자(Other of Jouissance)는 본질적으로 비일관적(Inconsistent)이며 텅 비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절대자는 완벽하지 않으며 상징계 자체에 근원적인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종교적 환상을 가로지르기(Traversing the Social Fantasy) 위해서는 교리나 교주의 모순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을 넘어서, 대타자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리가 텅 비어있음을 주체 스스로 목도해야 합니다. 이는 주체에게 감당하기 힘든 우주적 고립감을 안겨주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도들은 눈앞의 균열을 애써 무시하며 환상의 안전망 속으로 퇴행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맹신의 메커니즘 요약]

  1. 부유하는 불안: 삶의 무의미함과 고통이라는 텅 빈 기표들이 떠돎.
  2. 누빔점의 등장: 절대적 교리나 지도자가 나타나 흩어진 기표들을 하나의 거대한 의미망으로 꿰맴.
  3. 셰 부오이(Che Vuoi): 대타자의 알 수 없는 욕망 앞에서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교단이 제시하는 환상을 욕망의 방어막으로 채택함.
  4. 사후적 동일시: 과거의 모든 우연적 사건을 필연적 섭리로 재해석하며 상징계에 완벽히 봉합됨.

 

두 번 죽는 주체와 반복의 역학 

이데올로기의 무시무시한 장악력은 죽음의 개념조차 왜곡시키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당신은 항상 두 번 죽는다(You Only Die Twice)는 선언은 상징적 죽음과 생물학적 죽음 사이의 괴리를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두 번의 죽음 사이(Between the Two Deaths)에 놓인 주체야말로 가장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 테러를 저지르거나 집단 자살을 감행할 때, 그들은 이미 상징계 내에서 자신을 죽은 자로 규정(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린 순교자)했기 때문에 생물학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좀비와 같은 상태가 됩니다.

혁명으로서의 반복(Revolution as Repetition)은 세뇌된 집단이 세상과 충돌하는 방식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파괴하고 새로 세우겠다는 혁명적 수사를 구사하지만, 실상 그들의 행위는 무의식적 외상의 맹목적인 반복에 불과합니다. 이들의 세계관은 언제나 최후의 심판의 관점(The Perspective of the Last Judgment)에서 현실을 재단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세속적 가치나 도덕은 다가올 영적 전쟁이나 종말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폄하됩니다. 이러한 극단적 시야각은 신도들로 하여금 현실의 인륜적 관계(가족, 친구, 직장)를 가차 없이 끊어내게 만드는 심리적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주인에서 지도자로(From Master to Leader)의 전환은 권력 구조의 현대적 진화를 보여줍니다. 전통적인 주인은 강압적인 물리력으로 복종을 요구했다면, 현대의 사이비 지도자는 스스로를 신도들과 동일한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첫 번째 봉사자로 포장합니다. "나는 너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를 위해 봉사할 뿐이다." 이 교묘한 수사학은 신도들의 자발적인 예속을 극대화하며, 지도자를 향한 비판을 진리 자체에 대한 모독으로 치환시키는 완벽한 이데올로기적 방패막이를 구축합니다.

 

실재의 주체와 강요된 선택의 아이러니 

그렇다면 도대체 이 끔찍한 이데올로기의 그물망 속에서 실재의 주체는 어떤 주체(Which Subject of the Real?)로 존재할까요? 지젝은 "메타언어는 없다(There is No Metalanguage)"는 라캉의 격언을 인용하며, 우리가 이데올로기 바깥의 완전히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현실을 조망할 수 있다는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맹신을 비판하는 이성적 계몽주의자들조차 자신들만의 지적 우월감이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남근적 기표(The Phallic Signifier)와 바르샤바의 레닌(Lenin in Warsaw) 농담은 표상의 불가능성을 유쾌하게 꼬집습니다. 종교적 대상은 결코 재현될 수 없는 실재의 빈자리를 억지로 채워 넣은 얼룩이자 대상입니다. 사회는 결코 조화로운 유기체가 아니며, 실재로서의 적대(Antagonism as Real)가 항상 내재해 있습니다. 종교 집단은 끊임없이 외부의 적(사탄, 이교도, 타락한 세상)을 발명해냄으로써 자신들 내부의 근원적인 적대와 균열을 은폐하려 합니다.

자유의 강요된 선택(The Forced Choice of Freedom)은 세뇌의 역설을 가장 소름 돋게 묘사하는 개념입니다. 교단은 신도들에게 자유 의지를 강조하며 선택을 제안하는 척하지만, 실상 그것은 "네 돈을 내놓지 않으면 목숨을 빼앗겠다"는 강도와 다를 바 없는 노골적인 협박입니다. 주체는 오직 복종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으면서도 그것을 스스로의 숭고한 결단으로 착각합니다. 대립물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와 또 다른 헤겔적 농담(Another Hegelian Joke)은 가장 고상하고 영적인 이상주의가 가장 끔찍하고 속물적인 물질적 착취로 변질되는 필연적 구조를 조롱합니다. 주체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상징계의 틈새에서 튀어나오는 실재의 응답(Subject as an Answer of the Real)일 뿐입니다. 신도들은 진리를 알고 있는 주체가 아니라, 단지 알고 있다고 추정되는 앎(The Presumed Knowledge)과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The Subject Supposed to Know)에 자신의 인지적 책임을 떠넘긴 비겁하고도 불쌍한 자아들입니다.

이데올로기의 극복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믿었던 그 대상이 사실은 나의 무의식이 투사된 공백임을 깨닫는 고통스러운 각성의 과정입니다.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의 인식 

대미를 장식하는 숭고함의 논리(The Logic of Sublimity)는 칸트와 헤겔을 넘나들며 이데올로기의 궁극적 본질을 파헤칩니다. 종교적 대상이 숭고해 보이는 이유는 그 대상 자체에 어떤 위대한 마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체가 자신의 결여를 은폐하기 위해 그 대상을 숭고함의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유명한 명제, 정신은 뼈다(The Spirit is a Bone)와 부는 자아다(Wealth is the Self)는 가장 고결한 영적 가치가 사실은 가장 천박하고 물질적인 잔여물과 절대적으로 동일하다는 파괴적인 진실을 선포합니다. 거룩한 종교적 이상향은 썩어가는 시체의 백골과 같은 층위에 존재하며, 영혼의 구원은 곧 교단의 물질적 부의 축적과 동일한 동전의 양면입니다.

정립하는, 외적인, 그리고 규정적인 반성(Positing, External and Determinate Reflection)의 복잡한 변증법을 거쳐, 우리는 마침내 전제들을 정립하기(Positing the Presuppositions)와 정립을 전제하기(Presupposing the Positing)의 뫼비우스의 띠에 도달합니다. 신도는 종교가 구원의 진리(전제)이기 때문에 믿는(정립)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정립)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가 구원의 진리라는 환상(전제)을 사후적으로 날조해냅니다.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 진리를 파악하라는 말은, 저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괴물이 외부에 객관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내면의 무의식적 주체가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하며 살찌우고 있는 우리 자신의 끔찍한 자화상임을 인정하라는 서늘한 명령입니다.

 

지젝의 이 섬뜩한 철학적 여정을 통과하고 나면, 맹신에 빠진 이들을 단순히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게 됩니다. 우리 역시 일상 속에서 돈, 명예, 국가, 혹은 사랑이라는 수많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들에 매달려 환상의 그물망을 짜내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진정한 철학적 각성은 이 견고한 상징계의 봉합을 찢어내고, 의미가 부재하는 차가운 실재의 심연을 직시하는 용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저 멀리 있는 초월적 진리가 아니라, 주체의 내면적 결여를 메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빚어낸 무의식적 찰흙 인형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세뇌당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화된 실재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이데올로기의 따뜻한 환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 기꺼이 맹목의 감옥을 짓는 존재입니다. 이 처절한 자기 기만의 메커니즘을 꿰뚫어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주체성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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