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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이방인' : 뫼르소는 왜 울지 않았나

by 소음 소믈리에 2026.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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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이방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나. 이 유명한 첫 문장 속에 숨겨진 뫼르소의 무관심은 과연 죄일까요? 태양 때문에 방아쇠를 당긴 남자의 진실과 부조리한 세상에 타협하지 않는 죽음을 파헤칩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신의 삶에서 이방인처럼 느껴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가끔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혹은 모두가 웃고 떠드는 회식 자리에서 문득 유리벽 너머의 세상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합니다. 마치 나만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것 같은, 그 묘한 소외감 말이죠.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듭니다. 우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적절한 슬픔, 적절한 기쁨, 적절한 반응을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 죄보다 더 큰 비난을 받으며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가 정말 사이코패스였을까요, 아니면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거짓말 놀이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유일한 정직한 인간이었을까요. 오늘 이 독서 노트에서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작품을 깊이 있게 씹고 뜯고 맛보려 합니다. 준비되셨나요? 뜨거운 알제리의 태양 아래로 함께 걸어가 보시죠.

 

1. 들어가는 글: 왜 그는 엄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는가

소설의 1부는 뫼르소의 일상을 담담하게,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건조하게 그려냅니다. 하지만 이 건조함 밑바닥에는 뜨거운 감각들이 꿈틀대고 있습니다. 1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육체적 감각과 태양입니다. 뫼르소는 추상적인 가치보다 눈부신 햇살, 시원한 바닷물, 마리의 웃음소리, 카페오레의 향기 같은 구체적인 감각에 반응하는 인물입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 유명한 첫 문장을 접했을 때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드셨나요? 아마도 당혹감이나 서늘함이었을 겁니다.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슬픔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1942년 작 이방인 L’Étranger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규칙대로 반응하지 않는 한 남자, 뫼르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낯선 충격을 받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남자의 무미건조한 목소리 뒤에 숨겨진 뜨거운 진실을 파헤쳐보려 합니다. 단순히 줄거리를 훑는 것이 아니라, 왜 그가 태양 때문에 방아쇠를 당겼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했던 그 고집이 우리에게 어떤 위로를 주는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연기를 강요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슬플 때 슬픈 표정을 짓고, 기쁠 때 웃어야 하는 사회적 약속들 말입니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 연기를 거부합니다. 그는 벌거벗은 영혼입니다. 태양 아래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듯,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꾸미지 않습니다. 이 글은 인간을 향한 연민과 경이의 시선으로 뫼르소라는 인물을 옹호하는 변론서가 될 것입니다. 부조리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그의 죽음이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삶을 사랑할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알제리의 뜨거운 태양 아래로 함께 걸어 들어가 봅시다. 그곳에서 우리는 낯선 이방인이 아닌, 가장 솔직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2. 제1부: 태양 아래의 세계, 감각만이 진실인 남자

1장 어머니의 장례식, 슬픔을 강요하는 사회 

소설의 시작은 뫼르소가 양로원으로부터 어머니의 부고 전보를 받는 장면입니다. 여기서부터 독자는 뫼르소의 독특한 내면세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실 앞에서도 지극히 육체적인 피로와 감각적인 불편함에 더 집중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의 더위, 졸음,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마시는 밀크 커피의 맛 같은 것들 말입니다. 사회적 통념상 우리는 부모의 장례식에서 오열하고 식음을 전폐하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그것이 효심이고 인간된 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뫼르소는 어머니의 관 뚜껑을 열어보겠냐는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관리인과 커피를 마십니다. 이것은 그가 패륜아라서가 아닙니다. 그저 지금 당장 슬프지 않고, 지금 당장 피곤하고, 지금 당장 커피가 마시고 싶기 때문입니다.

뫼르소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감각입니다. 그는 추상적인 개념인 죽음이나 슬픔보다, 내 살갗에 닿는 공기의 온도와 냄새에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양로원 친구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그는 오히려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들의 슬픔이 가짜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상황 자체가 주는 압박감 때문입니다. 장례 행렬을 따라가는 길, 쏟아지는 태양 빛은 그를 몽롱하게 만듭니다. 이글거리는 열기 속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은 하나의 비현실적인 사건처럼 지나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뫼르소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의미를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느끼는 더위와 피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육체가 느끼는 감각에 절대적으로 충실합니다. 이것이 훗날 재판 과정에서 그를 냉혈한으로 몰고 가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그가 얼마나 거짓 없는 인간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슬픈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자기 자신으로 존재했을 뿐입니다. 이 장에서 카뮈는 사회적 의례가 개인의 진실을 어떻게 억압할 수 있는지 조용히 묻고 있습니다.

소음 소믈리에의 시선 
뫼르소의 태도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적응 방식입니다. 의미 없는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않고, 주어진 순간의 감각에 충실히 사는 것. 카뮈는 이를 통해 기존의 도덕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려 했습니다.

2장 마리와의 만남과 해변, 삶은 계속된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뫼르소는 해수욕장에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 직장 동료였던 마리를 만납니다.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여자를 만나 해수욕을 하고, 코미디 영화를 보고, 정사를 나눈다는 설정은 당시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뫼르소의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입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장례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뫼르소에게 어제와 오늘은 인과관계로 묶인 무거운 사슬이 아닙니다. 각각 분절된 시간일 뿐입니다. 죽음은 죽음이고, 삶은 삶입니다. 마리의 웃음소리, 물에 젖은 몸의 감촉, 영화관의 활기찬 분위기는 뫼르소에게 생의 기쁨을 줍니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죄책감이란 사회가 주입한 관념일 뿐, 자신의 감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리가 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뫼르소는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지만, 아마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뫼르소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응, 사랑해라고 말할 법도 합니다. 하지만 뫼르소에게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는 자신의 현재 상태를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리를 욕망하고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지만, 그것을 사회가 정의하는 사랑이라는 틀에 가두려 하지 않습니다. 일요일을 보내는 그의 모습 또한 인상적입니다. 그는 발코니에 앉아 하루 종일 거리의 풍경을 관찰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변해가는 하늘의 빛깔, 저녁이 되어 들어오는 전차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는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이 관조적인 태도는 그가 세상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에게 일요일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었고, 어머니가 죽었어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는 냉소라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지독한 긍정입니다. 삶은 어떤 비극이 닥쳐도 계속해서 굴러간다는 사실을 뫼르소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3장 레몽과의 관계 시작, 우연이 빚어낸 운명  

3장에서 뫼르소는 같은 층에 사는 이웃 레몽 생테스와 친해지게 됩니다. 레몽은 동네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인물로, 포주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레몽은 자신의 변심한 애인(아랍인)을 손봐주고 싶다며 뫼르소에게 편지를 대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여기서 뫼르소의 태도가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그는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레몽이 나쁜 사람인지, 그 여자가 맞을 짓을 했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단지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편지를 써줍니다. 그는 레몽이 친구가 되자고 했을 때도 딱히 안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뫼르소의 행동 원리는 적극적인 의지가 아니라 수동적인 허용에 가깝습니다. 거절할 명백한 이유가 없다면 흐름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 선택은 훗날 그를 파멸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레몽과의 관계는 그를 아랍인들과의 분쟁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하지만 뫼르소는 이것이 위험한 일이라거나 범죄에 연루되는 일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그저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적인 사건의 연속일 뿐입니다. 뫼르소는 살라라는 노인과 그의 개 사이의 기이한 애증 관계도 관찰합니다. 서로 미워하면서도 떨어지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 관계의 모순을 보여줍니다. 뫼르소는 그들을 비웃거나 동정하지 않고 그저 바라봅니다. 레몽의 부탁으로 쓴 편지 때문에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졌을 때도 뫼르소는 레몽을 위해 증언을 해줍니다. 여자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레몽의 말을 그대로 증언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거짓말을 했다기보다는, 자신이 들은 대로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뫼르소에게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일어난 사실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가치 판단의 부재는 그를 사회의 규범 밖으로 밀어내어 이방인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그를 가장 순수한 관찰자로 남게 합니다. 그는 사건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철저히 외부인처럼 행동합니다.

4장 레몽 사건에 휘말림, 다가오는 그림자

레몽의 애인 문제로 인해 그녀의 오빠를 포함한 아랍인 무리가 레몽을 미행하기 시작합니다. 위기감이 고조되지만 뫼르소의 일상은 여전합니다. 마리와의 관계는 깊어지고, 그들은 바닷가에 놀러 갈 계획을 세웁니다. 주말에 레몽의 친구 마송의 별장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뫼르소는 자신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저 하루하루 닥쳐오는 상황에 반응할 뿐입니다. 4장에서는 뫼르소의 무심함과 주변 상황의 긴박함이 묘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레몽은 다혈질이고 폭력적이지만 뫼르소는 여전히 차분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뫼르소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레몽이 화를 낼 때 같이 화를 내주지 않고, 마리가 즐거워할 때 과장되게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타인을 배척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저 곁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뫼르소식의 연대입니다. 그는 감정의 잉여 없이 존재로서 함께합니다. 아랍인들과의 마찰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그는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상황을 주시합니다. 마치 자신에게 일어날 일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뫼르소의 가장 큰 특징이자 비극의 씨앗입니다. 세상은 사건에 감정을 이입하고 의미를 부여하기를 원하지만, 뫼르소는 사건을 그저 물리적인 현상으로만 처리합니다. 아랍인들이 쳐다보는 시선조차 그에게는 위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풍경처럼 다가옵니다. 독자는 불안감을 느끼지만 정작 주인공은 평온한 이 아이러니가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카뮈는 이를 통해 폭력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일상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다는 부조리한 현실을 포착해냅니다.

5장 직장 결혼 제안 무감정한 태도, 야망 없는 삶

사장으로부터 파리 지사 근무를 제안받은 뫼르소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출세의 기회로 여겨 기뻐했을 일입니다. 하지만 뫼르소는 생활이 변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없으며, 어떤 삶이든 본질적으로는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야망이 결여된 태도라기보다는, 삶의 조건이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깊은 통찰에 가깝습니다. 파리에 가나 알제리에 있으나 자신은 자신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과거 학생 시절에는 야망이 있었으나 학업을 포기해야 했을 때 그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그의 고백은, 그가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본질주의자임을 암시합니다.

같은 날 저녁, 마리가 그에게 결혼하자고 말합니다. 뫼르소는 네가 원한다면 하겠지만,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마리가 나를 사랑해?라고 다시 묻자, 그는 앞서 말했듯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답합니다. 마리는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아마 그 점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뫼르소와 세상의 불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결혼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이자 약속입니다. 하지만 뫼르소에게 결혼은 제도일 뿐 감정의 증명이 아닙니다. 그는 마리와 함께 있는 것이 좋기 때문에 결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사랑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되어야 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뫼르소는 기계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식당에서 만난 로봇 같은 여자를 흥미롭게 관찰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개 때문에 슬퍼하는 살라 영감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사회가 정해놓은 언어로 번역하여 표현하는 것을 거부할 뿐입니다. 그의 무감정은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감정 과잉 사회에 대한 침묵의 저항처럼 보입니다.

6장 해변에서 아랍인 살해, 결정적 사건

운명의 일요일, 뫼르소는 마리, 레몽과 함께 마송의 별장으로 갑니다. 눈부신 태양과 뜨거운 모래사장. 그곳에서 그들은 아랍인들과 마주칩니다.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고 레몽이 칼에 찔려 다칩니다. 치료를 받고 돌아온 레몽은 다시 아랍인들을 찾아 나서고, 뫼르소가 그 뒤를 따릅니다. 레몽이 총을 꺼내려 하자 뫼르소는 그를 말리며 총을 대신 받아 듭니다.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뫼르소는 바로 별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시 해변을 걷습니다. 태양 때문이었습니다. 태양의 열기가 그를 짓누르고, 머리가 아파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연히 다시 그 샘물 가로 돌아갑니다. 그곳에는 칼을 든 아랍인이 혼자 있었습니다. 아랍인이 칼을 뽑아 들자, 강렬한 태양 빛이 칼날에 반사되어 뫼르소의 눈을 찌릅니다. 그 순간, 뫼르소의 의식은 태양에 의해 장악당합니다. 하늘이 온통 불타는 것 같았고, 바다가 녹은 납처럼 끓어오르는 듯한 환각에 빠집니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 느꼈던 그 태양과 똑같은 태양입니다. 땀이 흘러 눈을 가리고, 참을 수 없는 열기가 그를 덮칩니다. 전신이 긴장된 그 순간, 권총의 방아쇠가 당겨집니다. 그리고 그는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네 발을 더 쏘아 박습니다. 이것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습니다.

이 장면은 소설의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난해한 부분입니다. 뫼르소는 살의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닙니다. 정당방위 상황도 모호합니다. 그는 오로지 물리적인 자극, 즉 견딜 수 없는 태양의 열기와 빛의 고통 때문에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조리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과 자연의 힘이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린 것입니다. 네 발을 더 쏜 행위는 이미 깨져버린 평화에 대한 확인 사살이자,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의식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태양이라는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무력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3. 제2부: 감옥과 재판, 사회의 심판과 이방인의 탄생

1장 체포 감옥 생활, 자유의 박탈과 적응 

체포된 뫼르소는 심문을 받습니다. 그는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변호사가 선임되지만, 변호사는 뫼르소의 태도에 당황합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며, 장례식 날 슬픔을 참았다고 말하라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뫼르소는 거짓말을 거부합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그것이 장례식에서 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는 혐오감을 드러내며 떠납니다. 뫼르소는 자신이 왜 변호사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지 의아해합니다.

예심 판사와의 만남은 더 극적입니다. 판사는 십자가를 들이대며 회개를 종용합니다. 뫼르소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자 판사는 격분합니다. 판사에게 뫼르소는 적그리스도입니다. 뫼르소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과 그에 대한 법적인 처벌이지, 영혼의 구원이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사법 시스템과 뫼르소의 인식은 완전히 엇갈립니다. 사법 시스템은 죄의 동기와 반성을 요구하지만, 뫼르소는 행위의 결과만을 인정합니다. 감옥 생활이 시작되자 뫼르소는 처음에는 힘들어하지만 곧 적응합니다. 그는 자유를 잃은 것보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것을 더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의 힘으로 지루함을 극복하는 법을 터득합니다. 방 안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거나, 어머니가 했던 말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적응한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가장 큰 재능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여전히 관조적인 태도를 유지합니다.

2장 재판 준비 변호사 검사, 연극의 시작  

재판이 다가오면서 뫼르소는 자신이 사건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변호사와 검사, 판사는 자신들만의 언어로 뫼르소를 재단합니다. 그들은 뫼르소라는 인간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범죄자 유형에 그를 끼워 맞추려 합니다. 재판정의 풍경은 마치 연극 무대와 같습니다. 기자들, 배심원들, 관객들은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기다립니다.

재판의 쟁점은 아랍인을 죽인 살인 사건 자체가 아니라, 뫼르소의 인격으로 옮겨갑니다. 어머니의 장례식 때 울지 않은 것, 그 다음 날 여자와 데이트를 한 것, 레몽 같은 자와 어울린 것 등이 낱낱이 파헤쳐집니다. 검사는 이 모든 사실을 엮어 뫼르소를 어머니를 정신적으로 살해하고, 계획적으로 아랍인을 죽인 냉혹한 괴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실의 나열이 진실을 왜곡하는 과정을 뫼르소는 묵묵히 지켜봅니다. 그는 자신이 범인인데도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재판 과정을 보며 기묘한 소외감을 느낍니다. 나는 재판에서조차 이방인입니다.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자리에서 나는 구경꾼으로 전락했습니다.

3장 재판 진행, 어머니 장례식 태도가 심판받다 

증인 심문이 이어집니다. 양로원 원장, 관리인, 마리, 레몽, 마송 등이 증언대에 섭니다. 검사는 증언들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뫼르소를 공격합니다. 관리인이 뫼르소와 커피를 마셨다고 증언하자 검사는 이를 패륜의 증거로 삼습니다. 마리가 수영복을 입고 영화를 봤다고 증언하자 검사는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정욕을 불태운 파렴치한으로 몰아갑니다. 마리는 울면서 그게 아니라고, 뫼르소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호소하지만 소용없습니다. 레몽의 증언조차 뫼르소가 범죄 세계의 공범이라는 증거로 채택됩니다.

검사의 논리는 완벽해 보입니다. 사회적 통념이라는 틀 안에서 뫼르소의 행동은 용서받지 못할 죄악입니다. 검사는 소리칩니다. 이 사람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가 사형당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살인이라는 행위보다 장례식에서의 태도가 더 큰 죄가 되는 부조리한 상황입니다. 뫼르소는 변호하고 싶지만, 변호사마저 입을 다물라고 합니다. 뫼르소는 자신이 정직하게 행동했던 모든 순간이 자신을 옥죄는 올가미가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단지 태양 때문에 그랬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릴지 알기에 입을 다뭅니다. 결국 재판장은 웃음바다가 되고, 뫼르소의 진실은 증발해 버립니다.

이방인을 향한 마녀사냥

재판 과정은 코미디에 가깝습니다. 검사는 뫼르소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변호사조차 뫼르소의 입을 막고 나를 믿으라고 강요합니다. 재판장은 뫼르소를 제외한 채 뫼르소의 운명을 논의합니다. 철저하게 소외된 피고인. 그는 자신의 재판을 구경꾼처럼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그가 아랍인을 죽인 이유보다, 그가 장례식에서 담배를 피우고 밀크커피를 마셨다는 사실에 더 분노합니다. 이것은 뫼르소가 그들의 규범, 즉 연극의 룰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자신들과 다른 이질적인 존재를 견디지 못합니다.

구분 뫼르소 (이방인) 사회 (재판부/검사)
죽음의 인식 자연스러운 현상, 불가피한 끝 도덕적 해석의 대상, 금기
행동의 동기 육체적 감각, 현재의 상태 관습, 규범, 사회적 약속
진실의 태도 거짓말(감정 과장)을 거부함 적절한 연기를 요구함

4장 사형 선고,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조리

검사의 최종 논고는 화려합니다. 그는 뫼르소에게 영혼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그를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그는 뫼르소의 죄가 곧 벌어질 존속 살해 사건의 죄와 다를 바 없다고 비약합니다. 뫼르소는 자신이 그 정도로 흉악한 범죄자인가 싶어 어리둥절합니다. 변호사의 최후 변론조차 뫼르소를 소외시킵니다. 변호사는 뫼르소의 입장이 되어 말하겠다며 나(I)라는 주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뫼르소의 목소리가 아닌 변호사가 재해석한 가짜 목소리입니다.

배심원들은 짧은 토의 끝에 유죄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목을 잘라 죽인다는 판결이 내려집니다. 사형 선고. 뫼르소는 이 판결이 얼마나 우연적이고 자의적인지 생각합니다. 판결문이 낭독되는 동안 그는 창밖의 소리, 트럼펫 소리, 냄새 등을 느낍니다. 삶은 여전히 저 밖에서 생동하고 있는데, 자신은 이곳에서 죽음을 선고받았습니다. 죽음의 선고는 엄숙하고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결정한 행정적인 절차에 불과합니다. 뫼르소는 감옥으로 돌아와 사형 집행을 기다리게 됩니다.

5장 사제와의 대화, 부조리 인식과 마지막 독백

마지막 장은 이 소설의 백미입니다. 사형을 기다리는 뫼르소는 탄원서가 기각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벽마다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공포에 떱니다. 그러다 부속 사제가 찾아옵니다. 사제는 뫼르소에게 신에게 귀의할 것을 강요합니다. 죽음 뒤의 다른 삶을 믿으라고, 죄를 씻으라고 말합니다. 뫼르소는 거절합니다. 나는 내 삶에 확신이 있고, 다가올 죽음에도 확신이 있다. 너희들이 말하는 신이나 구원은 내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가치도 없다.

사제의 끈질긴 설득에 뫼르소는 마침내 폭발합니다. 그는 사제의 멱살을 잡고 소리칩니다. 너희들의 그 확실하다는 믿음이 무슨 소용인가? 나는 죄인으로 죽지만, 그것은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다. 나는 이렇게 살았고, 저렇게 살지 않았다. 그래서 뭐? 만인은 특권층이다. 모두가 사형 선고를 받고 살아간다.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이 분노의 일갈을 통해 뫼르소는 비로소 완전한 해방감을 느낍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죽음까지 모두 긍정합니다.

사제가 떠나고 평온이 찾아옵니다. 밤의 끝자락, 별이 총총한 하늘과 소금 냄새, 여름의 냄새가 밀려옵니다. 뫼르소는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엽니다. 세계는 인간에게 무관심합니다. 인간의 도덕이나 슬픔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뫼르소는 그 무관심이 자신과 닮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세계는 형제 같습니다.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그는 처형 당일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자신에게 증오의 함성을 질러주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자신의 실존을 완성하는 마지막 의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독한 영웅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4. 나의 해석: 의미의 독재에 저항하는 '디지털 뫼르소'

오늘날 우리는 뫼르소가 살던 시대보다 더 강력한 의미의 독재 속에 살고 있습니다. SNS와 디지털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증명할 것을 요구합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행복한 표정의 사진을 올려야 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검은 화면이나 추모의 글을 올려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보다, 남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의 해시태그로 가공하여 전시하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으면 패륜아가 되듯, 온라인상에서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공감 능력 결여자로 낙인찍힙니다.

이런 맥락에서 뫼르소의 부조리는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는 좋아요를 받기 위해 연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팔로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타임라인을 꾸미지 않았습니다. 태양 때문에 방아쇠를 당겼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어떠한 서사도 부여하지 말고 그냥 내 감각의 오류였음을 인정해 달라는 처절한 외침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뫼르소입니다. 가끔은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저 덥다, 졸리다, 배고프다라는 원초적인 감각으로만 존재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요? 뫼르소의 죽음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보여지기 위한 삶을 연출하고 있는가? 이방인을 읽는다는 것은 그 불편한 질문과 마주하는 용기를 내는 일입니다.

 

5. 맺음말: 부조리를 넘어선 실존의 자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단순히 살인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된 세상에서 유일하게 진실하려 했던 한 남자의 비극적인 기록입니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사랑 앞에서도, 심지어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회는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지만, 카뮈는 그를 우리 사회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그리스도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진실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순교자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긴 것은 태양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핑계가 아니라,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힘과 부조리에 대한 가장 정직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세상의 무관심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음으로써 그는 역설적인 행복에 도달합니다. 부조리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죽음,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죽습니다. 사형수 뫼르소의 감방은 사실 우리 모두의 방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뫼르소처럼 현재를 치열하게 감각하고, 거짓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 내 살갗에 닿는 바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카뮈가 우리에게 남긴 뜨거운 유언일 것입니다. 이 분석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 심판이라는 통제 변수 속에서도 끝내 훼손되지 않는 인간 본연의 자유, 즉 실존적 자유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실전 적용: 나는 얼마나 이방인인가? 

우리는 얼마나 솔직하게 살고 있을까요? 아래 계산기를 통해 당신 안에 숨겨진 '뫼르소 지수'를 확인해보세요. 재미로 보는 테스트지만, 결과가 주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조리 지수 계산기

 

이방인 핵심 요약
주제: 부조리한 세계와 인간의 반항
뫼르소의 특징: 육체적 감각에 충실하며, 사회적 가식(거짓 감정)을 거부하는 정직한 인물.
태양의 의미: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닌, 뫼르소를 비극적 운명으로 몰아넣는 불가항력적인 힘.
재판의 본질: 살인 사건에 대한 심판이 아닌, 사회 규범을 따르지 않은 이방인에 대한 배제와 응징.

자주 묻는 질문 ❓

Q: 뫼르소는 왜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나요?
A: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시의 피로와 더위라는 현재의 육체적 상태에 정직하게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끝이기에 과장된 슬픔은 불필요했습니다.
Q: '부조리'란 무엇인가요?
A: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인간'과 '아무런 응답이 없는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괴리를 뜻합니다. 인생에는 정해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Q: 뫼르소는 왜 사형 선고를 받았나요?
A: 표면적으로는 살인죄지만, 실제로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인 무덤덤한 태도 때문에 '도덕적 괴물'로 낙인찍혔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자신들의 규범을 위협하는 이방인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지금까지 알베르 카뮈의 걸작 이방인을 함께 읽어보았습니다. 뫼르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동시에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끝까지 진실되게 살려 했던 한 인간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남들의 시선 때문에,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가면을 쓰고 살아가곤 하죠. 하지만 가끔은 뫼르소처럼 자신의 감정에 온전히 귀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총은 내려놓고 말이죠.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방인의 명장면은 무엇인가요? 혹은 뫼르소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소중한 생각을 나눠주세요. 안녕!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 믿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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