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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 & Ethics[가치와 규범]/Ethics[도덕과 합의]

당신이 믿지 않아도 행하는 이유: 지제크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by 소음 소믈리에 2026.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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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제크의 역작을 통해 마르크스와 라캉의 이론이 어떻게 현대 사회의 증상을 설명하는지 살펴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천하고 있는 환상의 구조를 파헤치고 싶은 분들을 위한 깊이 있는 안내서입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은 순수한 지적 당혹감이었습니다. 철학서라기보다는 정신분석학자가 쓴 추리 소설 같기도 했고, 때로는 난해한 농담집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문장은 자꾸 빗겨 나갔고, 논리는 미끄러졌으며,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철학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유가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난해함 속에 감춰진 거대한 통찰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저는 그 낯선 사유 방식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광고에 속지 않는다. 나는 정치적 선동에 휘둘리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 판단한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통해, 바로 그 믿음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가장 강력한 작동 방식임을 폭로합니다. 우리가 ‘벗어났다’고 확신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이미 가장 깊숙이 붙들려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독서 노트는 그 통찰을 따라가는 기록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반복되는 강박, 그리고 사회 곳곳에 스며든 모순들을 이해하기 위해, 저는 잠시 지젝이라는 차가운 안경을 빌려 쓰려 합니다. 그 안경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잔혹할 정도로 냉정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우리가 외면해 온 현실의 구조를 또렷하게 드러냅니다. 인간이기에 피할 수 없는 어리석음, 그리고 그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환상들. 저는 그것들을 비난하기보다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 복잡한 이론의 숲을 천천히 걸어가 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단순한 학술 요약이 아닙니다.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성에서 출발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지나, 라캉의 난해한 도식들을 건너 헤겔의 변증법에 이르기까지.
이 사유의 궤적을 따라가며, 우리 시대의 욕망과 불안을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를 마련하려는 시도에 가깝습니다.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흔히 생각하는 거짓된 신념 체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조건이며,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실재’를 직접 마주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종의 방어막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방어막의 구조를 하나씩 해체해 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어떤 잔여, 어떤 ‘숭고한 대상’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여정을, 함께 시작해 보겠습니다.

 

책 전체 문제의식과 방법론적 배경

이 책의 서론은 지젝이 앞으로 전개할 거대한 지적 프로젝트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지젝은 여기서 아주 분명한 목표를 설정합니다. 그것은 바로 정신분석학, 특히 자크 라캉의 이론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헤겔 철학을 새롭게 읽어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라캉을 구조주의자 혹은 포스트 구조주의자로 분류하며 난해한 언어의 유희 속에 가두려 할 때, 지젝은 라캉을 가장 급진적인 계몽주의자로 호명합니다. 그는 라캉의 개념들이 단순히 개인의 심리를 분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회와 역사, 그리고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선언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데올로기라고 하면, 어떤 정치적 선전이나 세뇌, 혹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주입된 거짓된 생각들을 떠올립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빨간 약을 먹기 전 바라보던 가짜 세계처럼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진실을 알게 되면, 즉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벗기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이데올로기 비판입니다. 그들은 아니오, 당신은 속고 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세요라고 말하면 대중이 깨어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젝은 서론에서부터 이러한 통념을 박살 냅니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은 그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하는 냉소적 이성의 형태를 띤다고 지적합니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을 도입합니다. 라캉에게 있어 실재(The Real)는 상징계(언어와 법의 질서)로 포착될 수 없는 잉여, 혹은 구멍입니다.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실재의 참을 수 없는 공백이나 외상을 가리기 위해 동원되는 사회적 환상입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단순히 거짓을 폭로하고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환상이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지탱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그 환상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지, 그 욕망의 구조를 파헤치는 작업이 되어야 합니다. 지젝은 이를 위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호명 이론을 넘어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주체의 무의식적 향유(Jouissance)를 포획하는지에 주목합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논리적 설득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은밀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서론에서 지젝은 헤겔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예고합니다. 흔히 헤겔은 절대지(Absolute Knowledge)를 통해 모든 모순을 통합하고 화해시키는 전체주의적 철학자로 오해받습니다. 하지만 지젝은 라캉을 통해 헤겔을 다시 읽으면서, 헤겔의 변증법이 모순의 해소가 아니라 모순의 필연성을 인정하는 과정임을 역설합니다. 헤겔에게 진리란 주체와 대상의 완벽한 일치가 아니라, 그 불일치 자체가 주체의 조건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젝이 책 전체를 통해 반복해서 강조할 실재의 주체 개념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이 서론에서 얻어야 할 통찰은 명확합니다. 세상을 분석할 때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나 명분만 보지 말고, 그 이면에 숨겨진 구조적 공백과 욕망의 흐름을 보라는 것입니다. 텍스트의 표면이 아니라 텍스트가 감추고 있는, 혹은 텍스트가 실패하는 지점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지젝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을 정말로 믿고 있는가? 아니면 믿는 척하는 제스처를 통해 안정을 얻고 있는가? 이 질문은 현대인의 삶, 특히 소셜 미디어와 알고리즘에 의해 끊임없이 취향과 정체성을 강요받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시대가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사물 그 자체에 스며들어버린, 그래서 더욱 강력해진 물신숭배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책의 방법론적 배경은 슬로터다이크의 냉소적 이성 비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치가 부패했다는 것, 광고가 거짓말이라는 것, 시스템이 불공정하다는 것을요. 하지만 우리는 행동합니다. 마치 모르는 것처럼요. 지젝은 이 행동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물신적 부인(Fetishistic Disavowal)을 지적합니다. 나는 그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가 바로 현대 이데올로기의 핵심입니다. 서론은 이 구조를 깨뜨리기 위해 증상(Symptom)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발명했는지 추적하겠다는 예고편과 같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1부에서 그 증상의 세계로 들어가 봅시다.

 

Part I. The Symptom - How Did Marx Invent the Symptom?

1부의 첫 번째 소주제인 마르크스는 어떻게 증상을 발명했는가는 지젝의 천재적인 연결 능력이 돋보이는 챕터입니다. 여기서 지젝은 마르크스의 상품 형식 분석과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사이에 놀라운 구조적 상동성(homology)이 있음을 밝혀냅니다. 보통 사람들은 마르크스는 경제를 다루고 프로이트는 심리를 다루니까 서로 관계가 없거나, 기껏해야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처럼 기계적으로 결합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지젝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Form)에 주목합니다.

프로이트가 꿈을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꿈의 숨겨진 의미(잠재몽)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꿈 해몽을 할 때 개가 나오면 무슨 뜻이고, 이가 빠지면 무슨 뜻이고 하는 식으로 숨겨진 콘텐츠를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프로이트에게 진정한 비밀은 왜 그 내용이 하필이면 그런 꿈의 형식(전현몽)을 띠고 나타났는가에 있습니다. 즉, 잠재적인 사고가 꿈이라는 왜곡된 형식으로 변환되는 꿈 작업(Dream-work)의 메커니즘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상품 분석도 이와 똑같다고 말합니다. 마르크스의 천재성은 상품의 가치가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내용을 발견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왜 노동이라는 내용이 하필이면 상품의 가치라는 형식을 취하는지를 물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형식의 비밀입니다. 상품 교환의 세계에서 우리는 물건과 물건이 교환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적 관계는 상품이라는 형식 뒤로 사라지고, 마치 상품 자체가 마법적인 힘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상품 물신성(Commodity Fetishism)입니다. 지젝은 이 지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통찰을 던집니다. 상품 물신성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있는 착각이 아니라, 현실 자체에 존재하는 객관적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그저 금속 조각이나 종이 조각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행동할 때는 마치 돈이 신비한 가치를 지닌 성물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믿음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 속에, 그리고 지폐라는 사물 속에 외재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아니야, 나는 돈보다 소중한 가치를 믿어라고 생각하며 내면의 거리를 둡니다. 하지만 지젝에 따르면, 당신이 아무리 내면적으로 자본주의를 비웃더라도, 당신이 신용카드를 긁고 주식 차트를 확인하며 럭셔리 브랜드에 반응하는 순간, 당신의 행위는 자본주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는 내면의 신념이 아니라, 외부의 의례(Ritual)와 실천 속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발명한 증상의 개념입니다. 증상은 병리적인 오작동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지젝은 여기서 칸트의 인식론적 불가능성을 넘어서는 헤겔적 전회를 시도합니다. 칸트는 우리가 사물 자체(물자체)를 알 수 없고 현상만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지젝의 관점에서는, 현상(상품 형식) 자체가 사물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상품 형식을 벗겨내면 순수한 노동이나 인간관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 자체가 없으면 내용도 붕괴해 버리는 구조입니다. 이는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꿈의 형식을 벗겨내면 무의식의 진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꿈의 형식 자체가 무의식의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합니다.

이 챕터에서 우리는 숭고한 대상이라는 개념의 힌트를 얻습니다. 상품은 사용가치라는 구체적인 몸뚱이를 가지고 있지만, 교환가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초감각적인 성질을 동시에 가집니다. 이 교환가치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상품을 상품이게 만드는 숭고한 대상입니다. 이것은 마치 종교적 유물과도 같습니다. 낡은 뼈다귀 하나가 성인의 유골이라는 이유로 숭배받을 때, 그 뼈다귀(물질)는 숭고한 대상(이데올로기적 가치)의 숙주가 됩니다. 이처럼 이데올로기는 평범한 사물을 숭고한 것으로 승격시키는 메커니즘입니다.

여러분이 명품 가방을 볼 때 느끼는 그 묘한 아우라, 최신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을 때의 만족감, 이 모든 것이 바로 마르크스적 증상이자 물신성의 작동입니다. 우리는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에 덧씌워진 숭고한 환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상은 우리의 사회적 관계가 파편화되고 소외된 현실을 가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젝은 이 분석을 통해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행위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입이 부정하는 동안, 당신의 손과 발은 무엇을 긍정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성찰의 시작입니다.

 

Part I. The Symptom - From Symptom to Sinthome

1부의 두 번째 핵심 소주제인 증상에서 생텀으로의 이행은 지젝의 논의가 라캉의 후기 이론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지점입니다. 여기서 지젝은 이데올로기 비판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 급진적인 수정을 가합니다. 초기 정신분석에서 치료의 목표는 증상을 해석하여 그 의미를 밝혀내고, 이를 통해 증상을 해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내가 왜 손을 씻는 강박증이 있는지, 그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나 억압된 욕망을 말로 풀어내면 증상이 사라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것이 해석을 통한 진리의 도달입니다.

하지만 라캉은 말년에 이르러 어떤 증상들은 아무리 해석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오히려 환자는 그 증상을 은밀하게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증상(Symptom)과 구별되는 생텀(Sinthome)의 개념입니다. 생텀은 의미의 영역을 벗어난, 주체의 존재 자체를 조직하는 향유(Jouissance)의 핵입니다. 지젝은 이를 사회적 이데올로기 분석에 적용합니다. 우리가 사회의 부조리나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아무리 비판하고 분석해도, 왜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지속되는가? 그 이유는 그 모순이 우리에게 일종의 뒤틀린 만족감, 즉 잉여 향유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복잡한 서류 절차를 욕합니다. 하지만 만약 관료주의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모든 것이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변한다면, 그는 오히려 허탈해하거나 새로운 불만을 찾아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관료주의를 욕하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 내가 정의롭다, 나는 시스템보다 우월하다라는 나르시시즘적 만족감을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은 시스템의 탓을 함으로써 자신의 실패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관료주의는 단순한 사회적 병폐가 아니라, 그 사람의 정체성을 지탱해 주는 생텀이 됩니다.

지젝은 여기서 당신의 증상을 사랑하라(Love your symptom as yourself)는 라캉의 명제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증상을 방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이 병리적이고 모순적인 증상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즉 증상이 바로 나 자신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잘못된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향유가 조직되는 방식입니다. 민족주의, 인종차별, 파시즘 같은 강력한 이데올로기들은 논리적 설득력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증오나 배제를 통해 얻는 집단적 향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것을 훔쳐가려는 타자라는 환상은 우리에게 훔쳐갈 고귀한 무언가가 있다는 환상을 역설적으로 강화해 줍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이죠.

이 생텀의 개념은 이데올로기 비판의 어려움을 보여줍니다.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그 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향유의 결속력을 끊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지젝은 이를 숭고한 대상과 연결시킵니다. 숭고한 대상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허한 사물(Das Ding)이지만, 주체의 환상에 의해 욕망의 원인으로 격상된 것입니다. 이 대상 주위를 맴돌며 얻는 향유가 바로 주체를 묶어두는 족쇄이자, 동시에 주체가 붕괴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버팀목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수많은 중독들, 끊임없는 뉴스 확인, 쇼핑, 타인에 대한 뒷담화 등도 모두 생텀의 구조를 가집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의미하거나 해롭다는 것을 알지만(이성적 판단), 그것이 주는 즉각적인 쾌락이나 안도감(향유) 때문에 멈추지 못합니다. 지젝은 이 지점에서 이데올로기의 종말은 우리가 진실을 깨달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잉여 향유와의 관계를 재설정할 때, 즉 환상을 가로지를 때 온다고 말합니다. 환상을 가로지른다는 것은 환상이 거짓임을 아는 것을 넘어, 환상을 통해 내가 얻고 있던 그 더러운 즐거움을 직시하고, 그 즐거움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나는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이 파트에서 우리는 법(Law)과 초자아(Superego)의 관계에 대해서도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법은 공식적인 규칙이지만, 초자아는 그 법을 위반하도록 부추기거나 법을 지키는 것 자체에서 가학적인 쾌락을 얻도록 명령하는 목소리입니다. 이데올로기는 겉으로는 법을 따르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은밀한 일탈을 공유함으로써 결속을 다집니다. 학교나 군대, 회사 같은 조직에서 공식 규정보다 야매나 꼼수가 더 중요한 결속의 기제가 되는 것을 떠올려보세요. 그 꼼수를 공유할 때 우리는 진정한 우리가 됩니다. 이것이 생텀으로서의 이데올로기적 향유입니다. 지젝은 이 향유의 끈적거리는 유대야말로 정치적 분석의 핵심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Part II. Lack in the Other - ‘Che Vuoi?’

2부의 시작인 케 부이?(Che Vuoi?)는 이탈리아어로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라캉의 유명한 욕망의 그래프(Graph of Desire)에서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지젝은 이 질문을 통해 주체와 대타자(The big Other) 사이의 관계를 해부합니다. 주체는 항상 타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나에게서 무엇을 원합니까? 어린아이가 부모의 눈치를 보며 엄마가 왜 저런 표정을 짓지? 나한테 뭘 바라는 거지?라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어라는 상징계(대타자)에 던져지고, 그 타자의 욕망을 해석하려 애쓰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타자 역시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도, 사회도, 신도, 법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주체는 타자의 결여를 견딜 수 없어합니다. 타자가 불완전하다면 나의 존재 근거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체는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타자의 저 알 수 없는 욕망에는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거야라고 가정하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환상을 스크린으로 사용합니다. 지젝은 유대인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환상을 예로 듭니다. 나치는 사회가 혼란스러운 이유(대타자의 결여)를 인정하는 대신, 유대인이라는 음모론적 타자를 설정하여 그들이 우리의 향유를 훔쳐갔기 때문에 사회가 문제라고 설명합니다. 이 환상은 타자의 결여를 은폐하고, 주체에게 안정적인 적을 제공합니다.

여기서 케 부이?는 공포의 질문이 됩니다. 타자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불안(Anxiety)을 느낍니다. 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호출에 응답합니다. 국가가, 회사가, 혹은 연인이 나를 부를 때, 나는 그 부름에 합당한 주체가 되려고 노력함으로써 타자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지젝은 라캉을 인용하여 타자의 타자는 없다라고 선언합니다. 즉, 상징적 질서를 보증해 주는 절대적인 신이나 메타-언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타자는 단지 우리가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한에서만 작동하는, 일종의 집단적 허구입니다.

이 소주제에서 다루는 숭고한 대상은 바로 이 타자의 결여를 가려주는 마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주체는 숭고한 대상을 통해 타자가 완전하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왕, 지도자, 스타, 혹은 숭고한 이념 등은 사실 텅 비어 있는 상징계의 중심을 채우고 있는 우연한 요소들입니다. 지젝은 이를 누빔점(Point de capiton)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둥둥 떠다니는 수많은 기표들(말들)을 하나의 의미 체계로 고정시키는 중심점입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라는 누빔점이 찍히면 자유, 인권, 평등 같은 단어들은 모두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 고정됩니다. 반대로 자유 민주주의라는 누빔점이 찍히면 같은 단어들이 시장 경제와 개인의 권리로 고정됩니다.

이데올로기 투쟁이란 바로 이 누빔점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어떤 기표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할 것인가? 이것이 헤게모니 싸움입니다. 케 부이?라는 질문은 주체로 하여금 이 누빔점을 갈구하게 만듭니다. 나에게 의미를 줘! 나를 정의해 줘!라고 외치는 주체에게 이데올로기는 명확한 정체성을 제공하며 유혹합니다. 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아들이다, 너는 혁명의 전사다, 너는 창의적인 인재다. 이런 호명들은 주체의 불안을 덮어주지만, 동시에 주체를 상징계의 감옥에 가둡니다.

지젝의 통찰은 우리가 이 질문의 구조 자체를 꿰뚫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는 나에게 무언가를 원하지 않습니다. 타자는 그저 텅 비어 있습니다. 그 공백을 마주하는 것, 타자가 나에게 아무런 정답도 줄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주체적 자유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 나에게 명령해 주기를, 나를 이끌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주인(Master)을 원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 주인은 알고리즘이나 데이터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유튜브 추천 영상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보다 더 잘 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케 부이?의 답을 알고리즘에게 양도하는 것입니다.

이 챕터를 통해 우리는 인간 욕망의 근본적인 수동성과 의존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윤리적 주체는 이 타자의 침묵을 견뎌내며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입법하는 자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영웅적인 결단이 아니라, 환상을 횡단하여 비참한 실재를 껴안는 행위입니다. 지젝이 말하는 숭고함은 저 높은 곳에 있는 빛나는 이상이 아니라, 쓰레기 같은 실재 속에 숨겨진, 오직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보물입니다.

 

Part II. Lack in the Other - You Only Die Twice

2부의 두 번째 소주제인 당신은 두 번만 죽는다(You Only Die Twice)는 제목부터가 007 영화의 패러디이자, 죽음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탐구입니다. 여기서 지젝은 생물학적 죽음과 상징적 죽음의 차이를 구분합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두 번 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육체가 소멸하는 생물학적 죽음이고, 두 번째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격, 명예, 기록이 말살되는 상징적 죽음입니다. 혹은 순서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안티고네처럼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여 산 송장이 된 상태(상징적 죽음)에서 육체적 죽음을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지젝은 이 두 죽음 사이의 간극(Gap)을 주목합니다. 이 공간은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끔찍하고도 숭고한 영역입니다. 라캉은 이를 아테(Ate)의 영역이라고 불렀습니다.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신을 묻어주겠다는 고집 때문에 왕의 법을 어기고 산 채로 무덤에 갇히는 형벌을 받습니다. 그녀는 상징계(왕의 법)로부터 추방당했지만 아직 죽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절대적인 고독과 파괴 불가능한 욕망의 위치, 이것이 바로 윤리적 주체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이 소주제는 전체주의와 역사적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스탈린주의 쇼 재판에서 피고인들은 단순히 처형당하는 것(생물학적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과 역사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며, 기록에서 지워지는 상징적 죽음을 강요당했습니다. 반대로, 어떤 인물들은 죽은 뒤에도 상징적으로 계속 살아남아 유령처럼 배회합니다. 레닌의 시신이 박제되어 보존되거나, 죽은 독재자가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지젝은 이를 숭고한 신체라고 부릅니다. 자연적인 부패를 면한 불멸의 신체는 이데올로기가 영속성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입니다.

여기서 두 죽음 사이의 공간은 몬스터나 언데드(좀비, 뱀파이어)가 출몰하는 공포 영화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존재들은 상징계의 질서에 통합되지 않는 잉여, 즉 실재의 귀환을 상징합니다.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실재의 귀환을 막기 위해 장례식과 같은 상징적 의례를 치릅니다. 장례식은 죽은 자를 편안히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다시 돌아와 산 자를 괴롭히지 않도록 상징계 안에 잘 정착시키는(처리하는) 의식입니다. 만약 이 의식이 실패하면 죽은 자는 악령이 되어 돌아옵니다. 이것은 역사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청산되지 않은 역사(친일파, 독재, 학살 등)는 상징적으로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기에 끊임없이 현재로 귀환하여 정치적 갈등을 유발합니다.

지젝은 또한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개념을 비판합니다. 역사는 미리 정해진 법칙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이 발생한 후, 사후적으로(retroactively) 그 원인이 재구성될 뿐입니다. 이것이 기표의 소급적 효과입니다. 혁명이 성공하면 그 이전의 혼란은 혁명의 전조로 해석되지만, 실패하면 단순한 폭동으로 기록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행동을 통해 과거의 의미까지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운명을 바꾸는 힘입니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그 운명의 의미는 주체의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이 챕터에서 우리는 관료주의와 전체주의가 어떻게 죽음을 관리하는지 봅니다. 관료주의 세계에서 서류상으로 죽은 사람은 살아있어도 아무런 권리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현대판 상징적 죽음입니다. 반면, 이데올로기적 영웅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지젝은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가 목숨(생물학적 생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무언가, 즉 숭고한 대상을 위해 기꺼이 두 번째 죽음을 불사하는 욕망의 차원을 보여줍니다.

안티고네의 아름다움은 그녀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 아니라, 상징계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타협하지 않는 욕망, 그것이 바로 주체를 숭고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타협을 합니다. 먹고살기 위해, 체면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하지만 지젝은 묻습니다. 당신의 욕망을 양보하지 않았는가?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위해 상징적 죽음(왕따, 해고, 비난)을 감수할 용기가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에게 서늘한 전율을 줍니다. 우리는 대부분 굿 라이프(안락한 삶)를 원하지만, 정신분석적 윤리는 그 너머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Part III. The Subject - Which Subject of the Real?

3부 실재의 주체는 어느 것인가?에서 지젝은 드디어 자신의 핵심적인 철학적 기획, 즉 주체(Subject) 개념의 재정립을 시도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구조주의는 주체의 죽음을 선언했습니다. 인간은 언어 구조의 효과일 뿐이며, 자율적인 자아란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지젝은 라캉을 통해 코기토(Cogito)를 부활시킵니다. 단,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투명하고 확신에 찬 자아)가 아니라, 텅 빈 공백으로서의 주체입니다.

지젝에게 주체는 실체(Substance)가 아닙니다. 주체는 상징계의 그물망으로 포착되지 않고 남은 잔여물, 즉 구조의 실패 지점입니다. 비유하자면, 완벽하게 짜여진 프로그램 코드에서 발생한 버그, 혹은 그 코드로 정의될 수 없는 예외적 입력이 바로 주체입니다. 이 공백은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공백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상징화가 가능하고, 변화가 가능합니다. 만약 우리가 구조에 완전히 포섭된다면 우리는 로봇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조와 불화하고, 삐걱거리고, 고통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주체임을 증명합니다.

지젝은 여기서 간지럼 타는 주체(The Ticklish Subject)라는 표현을 즐겨 씁니다(이는 나중에 그의 다른 책 제목이 되기도 합니다). 주체는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수동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자극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라캉은 이를 소외(Alienation)와 분리(Separation)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언어 속에 소외되지만, 그 언어가 다 담지 못하는 결여를 통해 분리되어 나옵니다. 이 결여가 바로 욕망의 원동력입니다.

이 파트에서는 실재(The Real)에 대한 정의가 더욱 정교해집니다. 실재는 현실(Reality)과 다릅니다. 현실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상징적으로 잘 정돈된 세계입니다. 반면 실재는 그 현실을 찢고 들어오는 외상적인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재난, 끔찍한 범죄, 갑작스러운 죽음, 혹은 설명할 수 없는 엑스터시. 이것들은 상징화에 저항합니다. 주체는 이 실재의 심연 위에 얇은 막을 치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지젝은 알튀세르의 호명(Interpellation) 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합니다. 경찰이 거기 당신!이라고 불렀을 때 뒤를 돌아보는 순간 주체가 된다는 알튀세르의 설명은 주체가 이미 죄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왜 뒤를 돌아봤을까요? 내가 뭔가 잘못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죄책감 때문입니다. 지젝은 이 죄책감이 법(Law) 이전에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법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막연한 불안과 죄책감에 형식을 부여하여 우리를 안도하게 만듭니다. 아, 내가 불안했던 건 속도위반 때문이었구나라고 구체적인 죄명을 받으면 우리는 오히려 편안해집니다.

따라서 주체는 법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법이 포획하려는 그 이전의 실재적 공백입니다. 이 공백은 텅 비어 있지만, 모든 상징적 우주를 집어삼킬 수 있는 블랙홀과 같은 중력을 가집니다. 지젝은 이 공백을 충동(Drive)과 연결합니다. 욕망은 결여를 채우려고 이동하지만, 충동은 결여 자체를 빙빙 돌며 즐깁니다. 욕망은 끊임없이 대상을 바꾸지만(이게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충동은 실패를 반복하면서 그 실패 자체에서 만족을 얻습니다. 이것이 죽음충동(Death Drive)입니다.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생명을 초과하여 지속되는 에너지입니다.

이 소주제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통찰은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여성이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노동자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상징적 신분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주체는 그 어떤 명칭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저항의 지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직업도, 당신의 성별도, 당신의 국적도 아닙니다. 당신은 그 모든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옷들 사이로 빠져나가는 숭고한 잉여입니다. 이 잉여를 인식할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The Void)이 역설적으로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유의 근거가 됩니다.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실재의 주체입니다.

 

Part III. The Subject - Not Only as Substance, but Also as Subject

드디어 대장정의 마지막 소주제,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Not Only as Substance, but Also as Subject)입니다. 이 문장은 헤겔 철학의 대전제이자, 지젝이 이 책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결론입니다. 지젝은 헤겔을 통해 주체와 객체(실체)의 이분법을 무너뜨립니다.

전통적인 철학에서 진리는 객관적인 실체와 주관적인 지식이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헤겔과 지젝에게 진리는 그 불일치 안에 있습니다. 주체가 대상을 잘못 인식하는 오인(Misrecognition) 자체가 진리의 과정에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상대를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착각합니다. 시간이 지나 콩깍지가 벗겨지면 우리는 아, 내가 속았구나, 저 사람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야라고 생각하며 진실을 알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지젝은 말합니다. 사랑의 진리는 콩깍지가 벗겨진 후의 팩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콩깍지가 씌워져 있던 그 환상의 상태가 만들어낸 변화에 있다고요. 그 환상 덕분에 우리는 사랑이라는 행위를 시작했고, 나 자신이 변화했습니다. 환상은 현실의 오류가 아니라 현실을 작동시키는 필수 부품입니다.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라는 말은, 객관적 세계(실체) 자체가 주체의 개입 없이는 불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주체의 결여(모름, 오해, 불안)는 객관적 세계의 결여를 반영합니다. 세계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주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이 완벽하다면 인간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역사가 이미 완성되었다면 우리의 실천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세계가 뚫려 있고, 미완성이기 때문에 주체가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지젝은 이를 기독교 신학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연결하기도 합니다. 성령(Holy Spirit)은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물이 아니라, 신이 죽고(십자가) 남은 신자들의 공동체(Community) 그 자체입니다. 신이 타자로서 저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사이의 사랑과 믿음이라는 주체적 실천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 이것이 실체가 주체가 되는 과정입니다. 초월적인 것은 내재적인 것의 틈새에 존재합니다.

마지막으로 지젝은 절대지(Absolute Knowledge)가 모든 것을 다 아는 상태가 아니라고 재차 강조합니다. 절대지는 환상이 사라진 후에도 삶이 지속될 수 있음을 아는 지혜입니다. 대타자는 없다는 것을, 숭고한 대상은 텅 빈 껍데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공허함을 견디며, 심지어 그 공허함을 웃음과 긍정으로 채우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시적 겸손함입니다. 우주적 차원의 거대한 공허 앞에서 인간은 작디작은 존재이지만, 바로 그 공허를 인식한다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책의 결론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데올로기의 환상을 걷어내고 남은 사막 같은 실재 위에서, 당신은 어떻게 욕망할 것인가? 당신의 생텀을 어떻게 껴안고 춤을 출 것인가? 지젝은 정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환상 없이도 살 수 있는 근육을 길러줍니다. 그것은 냉소주의가 아니라, 비극적인 긍정입니다. 세상은 엉망진창이고 구원은 오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이 부조리 속에서 우리만의 의미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체의 자유입니다.

이 마지막 챕터를 통해 우리는 지젝이 왜 그토록 난해한 이론들을 동원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구조들(자본주의, 국가, 법)이 사실은 우리의 믿음과 행위에 의존하고 있는, 내적으로 찢어진 헐거운 것임을 폭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괴물은 무섭지만, 그 괴물이 내면의 공포가 투사된 것임을 알 때 우리는 괴물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그 시선을 선물합니다.

결론: 이데올로기의 매트릭스를 넘어

긴 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는 거대한 산을 하나 넘었습니다. 이 책은 단지 1980년대에 쓰인 난해한 철학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뜻밖의 생존 매뉴얼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우리가 지나온 길을 잠시 돌아봅시다. 이데올로기는 내면의 신념이 아니라 외부의 실천 속에 있습니다.
생각이 아니라 습관 속에서, 의식이 아니라 몸짓 속에서 작동합니다. 알고리즘을 무심코 따라 움직이는 우리의 손가락이, 어쩌면 가장 정확한 이데올로기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증상(Sinthome)을 통해 향유를 얻습니다. 끊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반복하는 나쁜 습관들, 끝없이 되풀이되는 불평들. 그것들은 고통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은밀하게 만족시키며 시스템에 묶어 둡니다. 타자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어딘가 비어 있고, 어긋나 있으며,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공백을 견디지 못해 ‘완벽한 리더’, ‘완벽한 상품’, ‘완벽한 해답’ 같은 숭고한 대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만든 그 환상을 다시 숭배합니다. 마지막으로, 주체는 그 결여를 메운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공백 자체에 가깝습니다. 환상을 가로질러,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떠맡을 때 비로소 탄생하는 어떤 자리. 남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허공 위에서 스스로 춤추는 존재. 어쩌면 그것이 지젝이 말하는 ‘주체’일 것입니다. 이 논의를 오늘의 디지털 환경에 옮겨 보면 풍경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오늘날 우리의 숭고한 대상은 데이터와 AI입니다. 우리는 AI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 믿고, 데이터가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마치 거대한 ‘대타자’가 어딘가에서 모든 답을 보관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AI 역시 인간의 텍스트를 학습한 통계적 기계에 불과합니다. 그 안에는 주체도, 욕망도 없습니다. 우리가 AI에게 질문을 던질 때—“Che vuoi?”— 사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결여를 향해 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최적화는 정답을 따르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AI가 내놓은 결과와 우리가 체감하는 현실 사이의 틈을 포착하고, 그 간극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알고리즘이 추천하지 않는 길을 선택할 때, 데이터가 예측하지 못한 행동을 감행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데이터 덩어리가 아니라 주체로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아마도 필요한 것은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아주 작은 점검일지도 모릅니다. 무심코 반복하는 소비, 보여주기식 SNS, 관성처럼 이어지는 일상 속 의례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뒤틀린 즐거움을 얻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 그리고 그것을 끊어낼 수 없다면, 최소한 그것이 ‘나의 선택’임을 인정하는 일. 그 순간, 세상은 더 이상 우리를 속이는 매트릭스가 아니라 우리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장(場)으로 바뀔 것입니다.

지제크 사상 핵심 요약
증상과 생토옴: 해석되는 메시지가 아니라 주체의 존재 방식
숭고한 대상: 빈 공간을 욕망으로 채운 이데올로기적 물신
이데올로기: 알면서도 행하는 냉소적 실천의 구조
실재의 주체: 구조적 결핍이자 공백으로서의 주체성

실전 적용: 이데올로기적 냉소 지수 계산기 

우리는 얼마나 이데올로기에 깊이 관여하고 있을까요? 지제크의 이론에 따르면, "믿지 않으면서도 행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입니다. 아래 계산기를 통해 당신의 행동과 믿음 사이의 괴리, 즉 냉소적 이데올로기 지수를 재미로 확인해보세요.

이데올로기적 냉소 지수 측정기 

자주 묻는 질문 ❓

Q: 이 책을 읽으려면 마르크스와 라캉을 다 알아야 하나요?
A: 배경지식이 있다면 좋지만 필수 조건은 아닙니다. 지제크는 영화나 유머 같은 대중문화 예시를 많이 들기 때문에, 난해한 개념도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만 포기하지 않는 끈기는 필수입니다.
Q: '숭고한 대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A: 그 자체로는 아무런 특별한 속성이 없지만, 우리의 욕망이 투영되어 숭고한 가치를 지니게 된 대상을 말합니다. 코카콜라, 타이타닉, 혹은 특정 이념적 구호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Q: 왜 지제크는 현대 철학에서 중요한가요?
A: 그는 딱딱한 독일 관념론을 현대의 대중문화와 정신분석학으로 생생하게 되살려냈습니다. 특히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현실이 사실은 얼마나 정교한 환상 위에 서 있는지 폭로함으로써 비판적 사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슬라보예 지제크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함께 훑어보았습니다. 이 거대하고 복잡한 미로를 통과하고 나니 어떠신가요? 여전히 세상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고 우리 자신조차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지제크가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는 명확합니다. 완벽한 답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불안한 공백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책에 도전하려는 여러분의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혹시 글을 읽으며 더 궁금한 점이나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언제든 댓글로 남겨주세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저자 슬라보예 지젝 / 출판사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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